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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밤쿤] 연인의 인연

[밤쿤] 연인의 인연

w. 쿠엔

핸드폰에서 음악을 찾으면서 쿤은 지하철의 문 옆으로 조금 더 몸을 붙여 섰다. 퇴근 시간의 지하철에 사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래도 전날만큼 숨도 못 쉴 만큼 들어차지는 않는 것에 쿤은 낮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몇 정류장 남지 않았으니 그런대로 참고 갈만은 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때 발생했다. 쿤은 갑자기 몸에, 엉덩이 쪽에 무언가 닿는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 기분. 쿤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굳이 그렇게까지 가까이 붙을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다는 핑계인지 어쩐지 제게 가까이 몸을 붙인 키와 덩치가 큰 남자 하나가 쿤과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시선을 피했다. 쿤은 고개를 내렸다. 남자의 손이 제 몸과 그의 몸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만졌나?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쿤은 고개를 다시 돌려 앞을 바라봤다.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괜히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쿤은 조금 더 몸을 움직여 기둥 옆으로 몸을 붙이면서 슬쩍 다시 남자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남자는 잠시 주변의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다시 쿤 쪽으로 몸을 붙여왔다. 아니, 대체 뭐야. 쿤은 다시 한 번 더 몸에 손이 닿는 느낌이 들면 한 마디만 하자, 라는 생각을 하며 꾹 눈을 내리감았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뒤에서 슥, 하고 다시 한 번 무언가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쿤이 확 뒤를 돌려는 찰나 더 커다랗게 쿵, 하고 남자의 손이 벽으로 밀어붙여졌다. 뭐지? 쿤이 완전히 뒤를 돌자 화난 눈을 한 갈색 머리의 다른 남자 하나가 제 뒤에 서 있던 남자의 손목을 잡아 지하철의 벽에 밀어붙인 상태였다.

“지금 뭐 하시는 거에요? 아까부터 왜 자꾸 이분 몸에 손을 대세요?”

갈색 머리의 남자가 크게 소리를 지른 덕분에 쿤 뒤에 서 있던 그 치한은, 어쩔 줄 몰라 당황한 눈치였다. 서 있던 사람들은 물론 앉아 있는 사람들까지 수근거리기 시작하자 치한은 순식간에 다음 역에, 제 손목을 붙잡던 갈색 머리 남자의 손을 빠르게 밀쳐내고 뛰쳐 내려버렸다. 크게 목소리를 내던, 그러나 그 목소리에 비해서 훨씬 앳된 얼굴을 가진 갈색 머리의 남자가 어, 하는 소리를 냈다.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는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 쯤 하면 됐어요.  감사해요.”

쿤의 목소리에 갈색 머리 남자가 아, 하고 다시 한 번 감탄사를 내뱉었다. 강단 있게 제 옆으로 뛰어와서 치한을 잡아 큰 목소리를 낼 때는 언제고, 자꾸 아, 어, 하면서 당황한 티가 나는 말을 뱉는 게 제법 귀여워보였다.

“이름이 뭐에요?”

“아, 그 저는, 스물다섯번째 밤이에요.”

“그래요? 저는 쿤이에요.”

당연하다는 듯이 제 이름까지 밝힌 쿤에게 밤은 조금 멍한 시선을 보냈다. 아까부터 덩치 큰 치한이 달라붙던 이 남자에게 시선이 갔던 것은 사실, 치한이 손을 대기 전부터였다. 회색 모직 코트를 큼지막하게 걸쳤음에도 밑으로 드러나는 슬랙스 아래로 발목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흰 색 스니커즈를 신은 발과 발목만 봐서는 겨울인지 여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위로 시선을 돌리면 완연하게 겨울이었다. 눈이 내려앉은 듯 빛이 닿는 정수리 쪽의 머리는 거의 은발에 가까웠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푸른 물이 들듯 옅게 푸른빛이 도는 머리가 찰랑였다. 정확히 목선에 닿는 단발이 쿤이 고개를 숙이거나 돌릴 때마다 물결치듯 흔들렸다. 사이사이 코나 턱이 약간씩 드러났다. 제법 가느다랗고 날렵한 선이었다. 정말 예쁘게 생겼다. 멍하니 연예인을 보듯 쿤을 바라보다 보니 뒤에 붙어 난잡하게 손을 움직이려 드는 치한이 같이 신경쓰여 버린 것 뿐이었다.

“감사해요. 보통 이런 일을 봐도 말려주기 쉽지 않은데.”

“아, 아니에요. 신고까지 했어야 하는건데.. 제가 잠깐 신경을 못 쓴 사이에..”

사실 쿤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부터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명 치한의 손목을 잡아 밀어붙이면서 바로 신고를 해야겠다, 하는 생각을 할 때쯤 쿤이 뒤를 돌았던 것이다. 그리고 쿤의 눈동자를 봤을 때 헉, 하고 숨을 들이킬 뻔했다. 눈동자가 마치 그의 머리를 물들인 파란색의 기원 같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도, 지나치게 푸른 눈이 잘 어울리는 새하얗고 전체적으로 선이 고운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치한을 놓쳐버린 것이었다. 쿤은 정작 밤이 제 얼굴을 빤히 바라봤는지 아닌지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괜찮아요. 그나저나 어디서 내려요? 지나친 건 아니에요?”

“아! 아니, 아직.. 아직 두 정류장 남았어요.”

순진하네. 쿤은 어쩔 줄 몰라하며 제 얼굴 근처를 부유해 다니는 밤의 시선을 캐치하고 낮게 웃었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자연스러운 갈색 빛깔의 머리를 세팅도 특별하게 하지 않은 남자는 사실 소년에 더 가까워보였다.
어리다고 하기에는 키도 훤칠하게, 심지어 저보다 컸고, 치한을 힘으로 한 번에 제압해낼 만큼 힘도 세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쿤이 밤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를 바라보고 있던 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어, 아.. 눈이 마주치자 순식간에 시선이 옆으로 비껴나간다.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보면 귀가 빨개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칼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두 정류장이면 같이 내리네요?”

“아 정말요?”

순진하게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를 보면서 쿤이 웃었다. 사실 두 정류장 후 그 역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제가 내려야 할 역은 이미 지났다. 그냥 같이 내리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언젠간 내가 이곳에 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로 상관없다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아니, 알아줄 정도로 좀 대화를 나눠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감사해서, 제가 커피라도 사드리고 싶은데 어떠세요?”

“아, 정말 괜찮은데.. 음, 그래도 괜찮을까요?”

밤은 조심스럽게 긍정적인 대답을 하면서 머릿속에 일정을 떠올렸다. 동아리 모임에 가던 중이었지만 어떻게든 핑계를 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일정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같이 들어버렸다. 조금 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데, 한 마디라도 더 나누어 볼 수 있다는데. 사실 커피는 제가 사도 좋았다.

“카페는 밤 씨가 좋아하는 데 갈래요. 역 근처 아니어도 좋아요.”

“아! 그럴까요?”

나란히 지하철 문 밖으로 나서면서 둘은, 어쩐지 모르게 우연한 인연의 느낌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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