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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밤쿤] 환상과 현실 사이

-신의탑 60분 전력 '환상'

[밤쿤] 환상과 현실 사이

w. 쿠엔

- 그런 사람은 없어. 그런 사람은 환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거야.

신념이라면 신념이었고 확신이라면 확신이었다. 그런 사람이 없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왔기에 그렇게 믿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 그 누구도 타인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지는 않을거야.

그 타인에게 어떠한 감정적인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애착과 같이 한 순간에 불타오르다가 한 순간에 깨져버릴 수도 있는 유리와 같은 것들은 이성적인 성취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 가족들도 그랬고, 가문 내에서 만나온 또래들도 그러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만든 모래성은 다음 날 어김없이 누군가의 발자국 아래 무너져 있듯이, 인정과 명예 앞에 친구라는 이름을 그림자 속에 숨긴 또래들은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다.

-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쉽게는 약하다고 불러.

사실은 약한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약하다는 이름 뒤에, 패배 뒤에 펼쳐진 길을 다 보지 못했던 건 잘못이었다. 그 대가는 생각보다도 쓰디썼다.

- 감정은 나를 강하게 만들 수 없어.

절대 약해지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이를 악 물고 올라가는 층마다 누군가는 사랑을 이야기하며, 누군가는 애정을 이야기하며, 누군가는 동정을 이야기하며 그러나 패배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 감정은 나를 강하게 만들 수 없어.

그러나 탑에 올라와서 만난 밤은 달랐다. 감정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동료들에 대한 사랑이, 지켜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행복을 지키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밤을 강하게 만들었다. 뜨거운 감정을 빼내야만 차갑고 단단해질 줄 알았던 검이, 그에게는 역으로 감정이 들어갈수록 뜨겁고 단단해졌다.

벌써 아득하게 멀어진 과거 속에서도 생생한 장면은 밤이 스스로가 검이 되어 분노로 타오르던 순간들이었다. 쿤은 제 눈앞에서 분노에 사로잡혀 마구 소리를 질러대던 소년을 생각했다. 피와 칼과 냉정으로 군림해온 호아퀸 앞에서 사랑과 연민에 대해 말하고 있는 소년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붉은 감정이 그를 담금질 했던지 어느새 강해진 모습이었다.

환상이 아니었다. 사랑으로, 애정으로, 제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히 자신을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그리고 그 힘으로 자기 자신보다도 타인을 먼저 챙기고 보호할 줄 아는 사람이. 제 눈앞에 있었고, 어느 새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존재할 수도 없고, 가까워질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밤은 옆에서 일찍부터 잠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체력이 떨어졌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방심한 사이에 상대팀에게 잡혀버린 자신을 구해낸다고 바로 적진의 한가운데로 돌진해 온 밤은, 그대로 큰 폭발을 일으켰다. 커다랗게 일으킨 공파술로 상대팀의 균형이 흐트러진 사이에 밤은 쿤을 빼내 다시 일행에게로 합류하는 데에 성공했다. 문제는 밤이 다쳤던 것이지만.


“괜찮으세요, 쿤 씨?”

쿤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옆에 누워 있던 밤이 어느새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자는 줄 알았는데.”

“자다가 깼을 뿐이에요.”

“내가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 다친 사람은 너인데, 네가 더 힘들지.”


전투 중의 부상이었다. 제 방심으로 밤이 다쳤다. 쿤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순간이었다. 내 방심으로 다치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한데. 쿤은 항상 같은 말을 반복했고, 밤은 그렇지 않다는 말만 반복하곤 했다. 쿤은 다시금 제 눈앞의 밤을 바라보았다. 밤이 쿤의 미간 사이를 살짝 눌러 인상을 편다. 밤은 알고 있었다. 늘 제가 다치면 쿤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밤은 제 쪽으로 돌아누운, 역시나 불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쿤의 뺨 위에 위로처럼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부상으로 인해 몸에 열이 올라, 평소보다도 쿤보다 몸이 뜨거운 편인데도 오늘 따라 닿아오는 쿤의 뺨이 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괜찮아요. 결국 쿤 씨를 구했으니까...”

쿤은 제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밤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쿤의 뺨 위에 밤의 손이, 그리고 그 위에 쿤의 손이 겹쳐졌다.

“네가 다쳤잖아.”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제가 다치지 않았으면 쿤 씨가 다쳤을지도 모르니까요.”

“네가 나서지 않았다면 네가 다칠 일은 없었을거야.”

“그건 다치는 일이에요.”

“...응?”

“나서지 않는 것도 저를 다치게 하는 일이에요. 쿤 씨를 지켜내지 못하는 것도, 그렇게 쿤 씨가 다치게 하는 것도.”

“나는, 나 혼자 다치는 게,”

“그건 제가 용납할 수 없어요.”

제 품에 있는 사람들이 제 전부니까요. 밤은 누워있는 채로 쿤의 몸을 끌어당겼다. 베개 아래로 파고들어오는 팔에 쿤은 말없이 밤 쪽으로 몸을 기댔다. 몸이 가까이 맞붙었다.

“다 괜찮아요.”

쿤은 가만히 밤의 등을 끌어안았다. 조금은 흔들려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당신의 나약함을 모두 품어줄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어쩌면 환상 속에 존재하지만은 않기를 바라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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