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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밤쿤] An aside (방백)

- 신의탑 60분 전력 '독백'

[밤쿤] An aside (방백)

w. 쿠엔

독백: 배우가 상대 배우 없이 무대 위에서 혼잣말로 하는 대사
방백: 상대 배우와 함께 무대 위에 있지만 상대는 듣지 못하고 관객만 들을 수 있다고 약속되어 있는 대사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독백인줄로만 알았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그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걸린 오랜 시간을 거쳐, 좋아한다는 말을 밖으로 꺼낼 수 있을 때까지. 아무도 깨어있지 못할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아무도 듣지 못하는 새벽에 아무도 듣지 못할 크기로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좋아한다는 말을 속삭이고 나서야 침대에서 뒤척이던 몸이 잠을 이룰 수 있을 때. 분명히 독백이라고 생각했었다. 무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제 짝사랑이니까. 그리고 아무도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무대 위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괜히 관객들이 듣는다고 해도 쏟아지는 건 야유나 안쓰러움에 기반한 동정이 아닐까 싶었다. 그럴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몰라도 상관없었다. 다 스스로 예상하고도 입 밖에 내기 시작한 말이었으니까. 이미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커진 뒤에는 모두 늦어버린 뒤였다.
시험 일정을 잡고 한 달 정도 남은 날, 마지막으로 팀원들이 휴식을 가지는 날이었다. 쿤은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축구를 하러 나가도 되냐고 묻던 동료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무리 시험이 조금 남았다고 하더라도, 다치지는 말고. 쿤의 충고 비슷한 잔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몰려나가는 동료들을 보며 쿤은 고개를 저었다. 잔소리를 해도 누군가는 근육통을 호소하고 누군가는 무릎을 다칠만큼 신나게 놀고 오겠지. 잔소리는 그저 해 본 소리라는 것을 쿤이나 동료들이나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밤도 함께 나갔던가? 쿤은 함께 몰려나가던 동료들 중에 반짝이는 금안이 있었나 방금 전의 기억을 되살리려다가 그만 두었다. 요즘은, 그 금빛 눈동자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요동치곤 했다.
카페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카페인을 줄이는 중이었다. 여전히 같은 빛깔의 블랙커피가 내려지고 있었지만 선명하게 디카페인 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를 좋아한 이후 마치 카페인이 과다하게 복용된 것처럼, 그렇게 심장이 뛰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꾸만 잊을만하면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쿤은 볕이 잘 드는 곳에 커피를 가지고 가서 앉았다. 오랜만에 숙소가 조용했다. 낮잠이라도 한 숨 자면 좋을 날씨였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시원하게 바람이 흘러들었다. 따뜻하고 온화한, 그를 닮은 햇살도 함께 들어왔다. 좋아한다는 말이 입 끝까지 들이닥친다. 티를 낼 수도 없고, 누군가가 들을 때는 입 밖으로 낼 수도 없는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이후 그는 간절하게 마음을 토해낼 곳을 찾듯이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가 떠오를 때면 자꾸만 좋아한다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기침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하던 말을 비웃던 과거의 자신에게 돌아간다면 그거 정말이야, 라고 말해줄 것이다.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꽃이 어느새 목구멍을 간질이는 듯이 자꾸만 자꾸만 말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애초에 입 밖으로 꺼내지 말걸. 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있지만, 그러기엔 이미 사랑이 너무 커져버렸다. 벌써 몇 년이었더라. 햇수를 거꾸로 되짚어가던 쿤은 오늘도 잠자기는 글렀구나, 하고 가만히 눈을 내리감았다. 눈을 내리감아도 눈꺼풀 위로 달콤한 꿀 마냥 부드럽게 햇빛이 드리워졌다. 어차피 잠에 들 수 없을 것이다. 그 때, 현관의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축구 하러 나간 동료들이 벌써 돌아올 리는 없고, 누구지? 두고 간 게 있나? 저절로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쿤은 몸을 일으켜 나가는 대신 가만히 누워 있는 걸 택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알아서 가져가겠지.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필요한 것을 찾으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쿤 씨, 주무세요..?”

듣기 좋은 목소리가 천천히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흘러들어왔다. 밤. 속으로만 밤의 이름을 부르는 쿤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머릿속으로 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되짚어나가던 상태에서 눈을 뜨면, 현재의 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될 지 스스로 장담할 수가 없었다. 밤은 미동이 없는 쿤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왔다. 걸음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멈춰있었다. 그리고 잠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더니, 높은 곳에 열어 두었던 창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주무실 때 창문 열고 주무시면, 감기 걸려요.”

쿤이 자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밤은 들을 사람 없는 말을 뱉었다. 그리고는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쿤은 소리만으로 밤이 창문을 닫고 건너편에 앉았구나, 를 알 수 있었다.

“커피가 식었는데... 쿤 씨.”

쿤 씨. 밤은 연이어 쿤의 이름을 불렀다. 자고 있지 않은 걸 아는 걸까? 자고 있는 걸 깨우는 걸까? 잠시 망설이던 쿤은 눈을 뜨기로 결심했다. 차분하게 한 번 마음속으로 심호흡을 한 쿤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일찍 들어왔네, 밤.”

“저는 축구하러 나간 건 아니고, 잠깐 밖에 나갔다 온 것뿐이어서요. 커피가 식은 것 같은데, 다시 가져다 드릴까요?”

“그래.”

밤은 쿤의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늘 쿤이 커피를 내리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따뜻한 커피로 바꿔 담았다. 쿤은 밤이 일어난 자리 옆에 놓인 작은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나갔다 왔다더니, 옷이라도 사러 다녀왔나? 평소 무언갈 사는데 별로 관심이 없던 밤이 무언가를 사왔다니 흥미가 동했다.

“여기요.”

“고마워, 밤. 그나저나 뭘 사온거야? 옷?”

“아, 아니요. 사실 뭘 사려고라기 보다는 그냥 나갔던건데, 쿤 씨께 드리고 싶은 걸 사서 얼른 들어왔어요.”

나한테? 쿤은 쇼핑백에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 꺼내는 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밤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투명에 가까운 얇은 신수 막으로 감싸여져 싱싱한 상태를 유지하는 푸른 장미였다. 작은 바구니에 여러 송이가 예쁘게 꽂혀 있었다. 쿤은 멍하니 꽃을 바라보았다. 왜 제게 주고 싶어서 사왔다고 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꽃잎을 부드럽게 물들인 푸른빛이 놀랄 만큼 쿤과 닮아 있었다. 멍하니 꽃을 보고 있는 쿤을 한번 바라 본 밤이 꽃의 곁을 둘러 싼 투명한 신수 막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역시나 투명하던 신수 막 속 공기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밤의 손이 닿은 맨 위부터 천천히 금빛 가루가 뿌려지듯이 내려오는 신수가 눈에 보이도록 진한 빛을 띠고 있었다. 금가루가 뿌려지듯 떨어지는 신수가 꽃잎에 닿을 때마다 신수를 머금고 살아가는 꽃이 더 생생한 푸른빛을 띠었다.

“밤...”

“좋아해요, 쿤 씨.”

예상치 못한 말에 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내가 실수로 말했나? 생각해봐도 분명 밤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았다. 밤이 내가 했던 말을 들었나? 분명 아무도 듣지 못하게 한 말이었는데.

“쿤 씨가 절 좋아하시는 만큼, 아니 더 많이 제가 쿤 씨를 좋아하고 있어요.”

“밤,”

“무대 위에는 아무도 없는 게 아니에요.”

쿤은 여전히 당황스러운 말을 들어 어떤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하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이, 제가 무슨 상황에 처해있는지 자체가 당황스러운 듯 했다. 밤은 신수 막 위에 올렸던 손을 떼어 쿤의 손을 붙잡았다.

“제가 당신 무대 위에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열심히, 좋아한다고 외치는 것도 좀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서.. 결국 먼저 말해버렸네요.”

사실은, 쿤 씨가 먼저 깨달아주기를 바랬는데. 밤은 쿤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제가 모르실 줄 알았나요? 쿤 씨가 절 좋아하시는 거, 평소 잘 주무시지 못하는 거... 방금도, 이렇게 어수선 한 곳에서 잠들 분이 아니라는 거...”

“그건...”

“저는 무대 위에 있었어요, 언제나, 쿤 씨가 무대 위에 오른 그 순간부터. 그리고 듣지 못한 척 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언젠가 저를 향해 말해주실 거라고 생각해서요.”

그런데 자꾸 망설이시고만 계시잖아요. 밤은 쿤의 두 손을 모두 붙잡았다. 맥박이 뛰는 부위도 아닌데, 밤이 제 심장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다. 맥박이 뛰는 손목부터 손끝까지 심장이 날 뛰는듯 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었다는 것도, 그가 저를 좋아한다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 꽃처럼, 그냥 좋으면 좋다고 해도 괜찮아요. 신수를 머금을수록 아름다워지는 꽃처럼.”

쿤은 밤을 바라보았다. 따뜻하기 그지없는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지금 바로는 아니어도 괜찮아요.”

기다릴게요. 당신의 무대 위에서. 밤이 잡고 있던 쿤의 손을 들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푸른빛의 장미가 금빛 신수 속에서 그 어떤 때보다도 빼어난 아름다움을 내뿜으며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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