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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밤쿤] 물빛 무도회

-신의탑 60분 전력 '무도회'

[밤쿤] 물빛 무도회

w. 쿠엔

샴페인 글라스가 부딪히는 소리, 샹들리에에 사람들의 말소리가 부서지는 소리. 또각이는 구두굽 소리와 음악 소리를 따라 이어지는 사람들의 옷자락이 스치며 사륵이는 소리. 접시와 식기가 부딪히고, 웃음소리가 궁그러지는 소리. 그 어떠한 소리에도 끼어 있지 않은 거의 유일한 사람일 쿤은 그저 서서 물끄러미 샹들리에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겜블러들은 따로 모여 회의를 가질 참이었지만, 회의가 진행되기 전 짧은 시간 무도회를 즐길 시간이 주어졌다. 짧은 시간이니만큼 겜블러들은 이리저리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리며 소란과 웃음을 즐기고 있었지만 쿤은 여전히 그런 데에 무심했다. 시간이 잠깐 난다면 그저 테라스에서 바깥  바람을 쐬는 게 낫다 싶을만큼. 겜블 결과에 대해 할 말은 많았지만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쿤은 가깝게 곁을 스쳐 지나가는 웨이터에게서 화이트 와인을 받아들고 걸음을 떼었다. 2층으로 올라가 테라스로 갈 생각이었다.
테라스는 탁 트여 있지는 못하더라도 부쩍 조용한 복도를 지나 나왔기 때문에 한 층 소음과는 단절된 느낌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들어 가면 속으로, 금빛으로 물든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다들 무도회를 즐기는 중이니 굳이 테라스를 찾는 사람은 없겠지 싶어 답답한 가면을 벗어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누가 어디서 보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로 총총히 맺힌 별빛이 눈에 들어왔다. 이전의 저는 ‘별’이라는 것을 보아도 그저 탑 안의 볼 라이트일 뿐이라며 흔해빠진 빛에서 시선을 돌렸지만, 언젠가부터 어둑한 하늘에 떠있는 별빛에서는 쉽게 눈이 떨어지지를 못했다. 밤, 쿤은 고개를 숙인 채로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아직까지도 곁에 있지 못한, 별만큼이나 멀고 막막한, 그러면서도 참으로 찬란한 이름이었다. 고개를 숙인 쿤의 옆얼굴을 바람이 다시 한 번 쓸어내며 무도회장의 안으로 휩쓸려 들어갔지만, 쿤은 여전히 미동 없이 테라스의 난간을 붙잡고 서 있을 뿐이었다.
우아한 왈츠가 울려 퍼지면서 드레스 자락과 정장의 옷자락이 얽혀들었다. 붉고 푸른 빛, 하얗고 노란 빛. 땅 위의 샹들리에처럼 반짝이며 부서지는 사람들의 발놀림을 멍하니 바라보던 밤의 시야 너머 멀리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검은 구두가 스쳐 지나갔다. 화려하게 음악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의 구두에 비해서 남자의 구두는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어서 눈에 띄었는지도 몰랐다. 밤은 바닥을 바라보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비올레, 한 잔 더 할래?”

물어오는 물음에 밤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시선은 여전히 건녀편의 남자에게 향한 채였다. 금빛 머리카락을 곧게 뒤로 넘긴 남자는 은색 가면으로 얼굴의 반 이상, 아니 거의 다를 가린 상태였다. 살짝 드러난 건 한 쪽 눈썹과 눈뿐이었다. 클래식한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의 손에는 술이 담긴 잔이 들려 있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섬광이 지나갔다.
그가 떠올랐다. 물빛이 일렁이는 순간을 찾으려고 했다. 찬란하게 부서지던 물빛 머리카락, 새파랗게 피어나던 웃음도. 그런데도 알 수 없는 흐름이 흘렀다. 문득 그렇게 시선이 갔다. 은빛으로 가려진 얼굴, 금빛으로 물든 머리카락임에도 불구하고 푸른 향이 흘렀을 뿐이었다. 잠깐 스쳐지나가던 눈동자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찬란한 물빛은 이미 제 마음 속에 있었음을.

밤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뒤에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가는 비올레를 여러 번 불렀지만, 비올레는 곧 돌아올테니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만을 남기고 다시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그토록 찾고 싶던 사람의 향기를 느겼다. 향이 닿지 않는 곳에서. 놓칠 수가 없었다.

밤은 느릿하고도 단정한 걸음걸이를 지켜보면서 확신했다. 그가 맞았다. 조용해진 주변에 경계를 늦춘 듯이 걸음은 천천히 옮겨졌다. 밤은 멀리서 복도를 통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어둑어둑한 복도 끝 테라스에서 빛이 새어 들어오고, 그가 그 곳으로 걸어 나갔다. 바깥에서 쏟아지는, 샹들리에보다 밝을 리 없고 화려할 리 없는 빛이 그를 비추었다. 그런데도 누구보다 화려하게 빛이 났다. 금빛 머리카락이 별빛을 받자 마자 푸른 물빛으로 바뀌는 기적을 보았다.

그 기적도 역시 마음 속에 있었음을.

밤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테라스로 마저 몸을 내딛었다. 너무 급해서 더 이상 발걸음을 죽이거나 할 생각이 나질 못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쿤이 몸을 돌렸다. 단 하나 가면 속이 아닌 겉으로 드러난 눈동자가 밤을 향했다. 장발로 변했지만 여전히 옅은 밤의 빛을 가진 갈빛 머리, 하나도 변하지 않은, 꿀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눈동자. 여린 듯 어린 듯 그러나 절대 무너지지 않던 강한 눈동자.

“밤...?”

“쿤 씨!”

쿤의 몸을 안아오는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잠깐, 쿤은 순간 제가 가면을 벗었던가, 머리 염색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가를 떠올렸지만 잊은 것은 없었다. 어떻게 저를 알아봤던가. 쿤은 멍하니 밤 품에 안겨있었다. 쿤 씨, 다시금 속삭여오는 작은 목소리에 그제서야 쿤은 밤의 몸을 마주 안아왔다. 훌쩍 품이 커 버린 밤의 몸이 막 실내에서 나와 쿤보다 따끈따끈한 온기를 내뿜으며 쿤을 안아왔다. 마치, 처음에 얼어있던 쿤을 녹였던 그 온기처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심장에서 뜨거운 것이 밀려들었다. 온기가 심장까지 파고든 모양이었다.

“어떻게, 나를...”

“잊을 수 없으니까요.”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밤은 여전히 쿤을 품에 꽉 끌어안은 채로 약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뛰지 않아도 심장이 벅차왔다. 감정의 격정적인 운동이 그 어떤 신체적인 운동보다 벅차게, 심장을 뜨겁게 들뜨게 만들었다.

“쿤 씨, 어떡하죠.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안나요. 아니, 어떤 말을 해야...”

“사랑해.”

그거 하나로 충분해. 쿤의 말에 밤은 천천히 쿤을 품 안으로 더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바람 결에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쿤은 밤이 제 어깨 안쪽으로 가득히 저를 끌어안는 것을 느끼면서 천천히 스스로의 가면을 들어냈다. 밤은 쿤의 손에서 가면을 받아들었다. 맨 얼굴을 드러낸 쿤이 밤의 품 안으로 더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 오로지 밤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잠깐만, 이대로 있어도 될까.”

“그럼요. 쿤 씨가 원하시는 만큼... 함께 있어요.”

가면을 써야하는 무도회 같은 데는 말고. 이렇게 둘이요. 밤은 약하게 흔들리는 쿤의 어깨를 보듬어 안았다. 약한 흐느낌, 약한 물기가 어깨를 타고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그 어떤 무도회에서 흐르는 음악보다도 잔잔하고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물빛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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