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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밤쿤] Romance in Christmas Eve

[밤쿤] Romance in Christmas Eve

w. 쿠엔

밤은 늘 같은 시간인 7시 반에 가게의 문을 열었다. 겨울이란 천지신명인 태양마저 늑장을 부리고 떠오르는 계절이었지만 밤이 가게를 여는 시간은 변함이 없었다. 아침에 와서 커피를 사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겨울이라고 오픈 시간을 바꾸는 것도 아침에 오려 했던 손님이 하나라도 있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별로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밤 내내 사람이 없어 추웠던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난방을 돌렸다. 빠르게 천장에 있는 난방 기계의 날개가 열리고, 따듯한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밤은 기계를 정리하고 원두를 갈아 내리기 시작했다. 일정하고도 적당히 큰 소리가 따듯한 공기와 함께 가게를 메웠다. 밖에는 나무들이 휘청였다. 바람이 많이 부는구나. 밤은 멍하게 바깥을 바라보았다. 삼십분 남짓이 지나도록 손님이 들어오지 않자, 한 잔 제가 마실 커피를 먼저 내릴까 하는 찰나에 문이 열렸다. 흐르듯 들어오는 찬바람에 밤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들어온 남자는 딱 보기에도 눈에 띄는, 은발에 가까운 하늘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귀 밑을 살짝 덮는 단발머리는 윤기 있고 차분했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나, 푸른빛이 도는 머리칼, 그리고 새하얀 얼굴로 조금 차가운 인상을 한 남자는 겨울과 잘 어울리는 듯 해보였지만 동시에 어쩐지 모르게 추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추운 날이었는데도 들어선 남자는 얇은 모직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검은 정장에 거의 남색으로 보이는 짙은 네이비 색의 모직 코트를 입은 남자는 그러나 별로 추워하는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메뉴판을 올려다보는 남자의 고개가 들리자 얇은 목선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제서야 아차, 한 밤은 남자를 향하던 시선을 급하게 내렸다. 처음 보는 사람을 너무 관찰하듯 쳐다보고 있었으니 남자가 눈치 챌 법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눈치 채지 못한 듯 곧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아메리카노 하나요.”

“따듯하게 드릴까요?”

“차가운 걸로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가지고 가시나요?”

“네. 테이크 아웃 할게요.”

“준비 되면 불러 드릴게요!”

추운 날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가장 잘 나가는 메뉴기는 했다. 하지만 앉아서 마시고 가는 것도 아닌 손님이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시킨 건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아니, 사실은 그가 신경이 쓰였다. 낮은 구두가 내는 가벼운 굽과 바닥의 마찰음이 커피를 내리는 귓가로 또렷하게 흘러 들어왔다. 왜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걸까. 처음 본, 그것도 본지 5분도 되지 않은 사람에게. 밤은 커피를 내리는 사이로 흘끗흘끗 남자를 바라보았다. 다리를 꼬고 소파에 기대앉은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핸드폰도 들여다보지 않은 채로 팔을 교차시키고 고개를 숙인 그는 피곤한 듯 눈을 잠시 감고 있는 듯 해 보였다.
은색에 가까운 옅은 푸른빛의 머리 사이로 반짝이는 새파란 빛의 피어싱이 눈에 띄었다. 온통 파란 사람이네, 차가운 사람일까. 실없는 생각이라며 고개를 저은 밤은 커피에 얼음을 넣고 뚜껑을 덮으면서 손님을 부를까 하다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곧 다시 커피 기계 앞으로 돌아간 밤이 커피를 한 번 더 내리기 시작했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손님은 그 남자 한 명 뿐이었다. 자신을 부른 게 맞는지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남자가 픽업대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놓인 두 잔의 커피를 보고는 고개를 들어 밤을 바라보았다.

“한 잔 시켰는데...”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밤은 두 잔을 모두 남자 앞으로 내밀었다.

“그, 날이 추우시니까, 뜨거운 커피 한 잔은 들고 가시라고 드렸어요. 손이 시려우시면 바꿔가면서 들고 가세요. 차가운 커피는 손이 시려우실테니까...”

밤의 목소리도 조심스러웠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집어 들었다.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푸른 빛 눈동자가 또렷하게 밤을 향했다. 순간 작게 숨을 들이킨 밤은 끌려 들어가듯 그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끌려 들어가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답고 청아한 빛의 눈동자였다. 잠시 그런 밤을 가만히 마주보던 남자가 입을 떼었다.

“어떤 커피에요?”

“아메리카노에요.”

“그럼 이것만 들고 갈게요.”

어, 아니, 차가운 것도..! 밤의 다급한 목소리가 뛰쳐나오자 이미 뒤를 돌아 걸어가려던 남자는 살짝 고개를 돌려 웃었다.

“괜찮아요. 저를 위해서 두 잔 만들어주셨다고 하셨으니까 한 잔은 제가 드리고 가는 걸로 할게요.”

남자는 다시 뒤를 돌았다.

“잠시만요, 그... ”

밤은 다시 한 번 다급하게 남자를 붙잡아놓고 할 말을 찾지 못해서 허덕였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데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순간 남자가 새는 웃음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가벼워지는 그의 분위기에 밤이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름이요? 이름은 쿤이에요. 내일 또 올게요.”

아까보다 한 층 더 상냥하게 웃어 보인 남자가 이제는 마침내 문을 열고 가게를 나갔다. 안녕히.. 가세요. 밤은 얼음을 동동 띄운 채로 남아 있는 커피를 바라보았다. 이름 알려달라고도 안했는데 이름 알려주셨네. 쿤... 그가 남겨두고 간 잔, 여전히 그 안의 얼음은 동동 떠다니고 있는 채였다. 마음속에 그의 이름이 둥둥 떠다니듯이.

쿤은 회사에 들어올 때까지 커피 컵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생각보다 따듯한 커피가 담긴 종이컵은 회사에 가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따듯함을 주었다. 워낙 뜨거운 걸 잘 못 먹는 성격이라 차가운 커피만 마셨는데, 따뜻한 커피가 의외로 걸음에 맞춰서 원두의 향을 강하게 풍길 때 마다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회사에 들어서 한 모금 마셨을 때에는 커피는 적당히 식어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커피 가게의 주인에게로까지 미쳤다. 가볍고 보슬보슬해 보이는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는 시종일관 상냥했다. 보통 제 주문대로 음료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성질부터 부릴 제 성격이 그 상냥하고도 주춤거리는 모습에 잠시 사그라든 것도 사실이었다. 반짝이는 금안을 하고 춥지 않게 가시라는 말을 마지막까지 당부하던 낮은 목소리가 사실은 나쁘지 않다기 보다는 좋았다. 좋았다니, 본능적으로 그 생각을 부정하려던 쿤은 제가 먼저 웃어줬고, 제가 먼저 이름까지 알려줬다는 사실을 떠올리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이건 부정할 수도 없잖아. 제게 몇 번이고 이름이나 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던 사람들을 밀어낸 게 몇인데. 그는 내일 가겠다는 약속을 먼저 던지고 나서야 핸드폰으로 일정을 확인했다.
내일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다. 나야 일정이 없지만 카페는 내일 열려 있을까? 꾹 입술을 깨물었다 놓은 쿤은 다시 한 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들러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오늘 받아온 것보다 더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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