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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올레쿤] 운명 01

[올레쿤] 운명

w. 쿠엔

‘머지않은 날, 분명 조정에 피바람이 불어올게다. 물론 그 때쯤 이 늙은이는 없겠지만 말이다.’

노파는 궁 근처의 작은 집에서 오래된 골동품을 파는 사람이었다. 당시 골동품 따위에는 관심이 없던 쿤이었으나, 그 노파의 집 뒤뜰에는 아름다운 연못과 꽃밭이 있었다. 공들여 가꾼 것도 아니건만 화려한 꽃들이 연못을 둘러싸고 피어나 있었고, 여름이 되면 커다란 나무들이 연못 위로 그늘을 드리우는 곳이었다. 가을이 되면 바람이 불면 꽃잎과 나뭇잎이 하나 둘 연못으로 떨어져 메아리를 일으키고 풍요로운 열매들이 맺었다. 쿤은 그 연못에서 자그마한 꽃잎들을 건져내거나 나뭇가지 끝에 실을 묶어 몇 안되는 고기들을 잡는 놀이를 좋아했다. 제가 사는 조정에도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이 크기야 했지만 인위적으로 파내고 물을 붓고 나무를 심어둔 것이 쿤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속에 사는 물고기 역시 외국에서 선물을 받아 하나같이 몸값이 비싼, 비단을 두른 비단잉어라고 불렸지만 쿤은 커다란 눈을 뒤룩이는 물고기를 몇 번 들여다 본 뒤로 그 역시도 흥미가 다 하고 말았다. 노파의 집 뒤뜰에 있는 자그맣지만 생명력 넘치는 물고기들이 훨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열심히 헤엄쳐 다녔지만 쿤에게 잡혀주지 않었다. 애초에 쿤의 낚시대끝에는 찌가 달려 있지 않았지만.

“..... 언제요?”

“기다리는게야?”

노파는 궁전에서 자주 도망치듯 나와 제 집에 숨어드는 쿤을 제법 예쁘게 여겼고, 무엇보다 눈치가 아주 빨랐다.

“아뇨.”

쿤은 냉큼 대답했으나, 이미 노파는 다 안다는 듯이 지긋한 눈으로 쿤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글세, 언제쯤일까. 아마도 네가 어느정도 장성하고 나서일테지. 지금처럼 꼬맹이인 너를 해칠 시련은 아니니까.”

노파는 여느때처럼 명확한 답을 주지 않은 채 집 안쪽으로 몸을 감추었다. 쿤이 조금 더 캐물어볼까, 하고 고민했으나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고 여레가 지났을 즘 그는 노파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잊고 살던 노파의 존재는 어느 날 새벽, 우레와 같이 쏟아지는 말발굽 소리와 다급한 비명 소리, 그리고 이내 궁 안을 헤집던 수 많은 병사들의 고함 소리와 서걱이며 베어지는 생명들의 소리와 함께 쿤에게 되살아났다.

노파가 예고했던 피할 수 없는 피바람이 어느새 불어닥치고 있는 것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리던 저녁, 고요 속에 잠든 궁중을 깨운 것은 멀리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와 뭇 사람들이 서리 위를 밟으며 나는 약한 소음이었다. 밤귀가 밝은 편인 쿤이었기에 그는 남들보다 한발 먼저 눈을 뜨긴 했으나, 상대 병사들도 거의 요새와 같은 궁중을 쳐들어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듯 그들은 빠른 속도로, 밀물처럼 걷잡을 수 없이 성 안으로 쳐들어 와 조정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비명이 울린 것은 쿤의 방과 멀지 않은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당하면서 터져나왔다. 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두르지 않으면 당한다. 쿤은 미처 다른 물건을 챙길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 하나만 몸 위에 두른 채로 재빠르게 뒷문을 통해 몸을 빼냈다. 뒷문으로는 병사들이 없을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그는 망설임 없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를 들었으니 분명 기마병일터, 그렇다면 궁의 뒤쪽으로 바로 자리잡은 험준한 산을 넘어오기가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뒷문 역시 병사들이 점령했더라면 다소 뒤쪽 문 근처에 자리잡은 제 방에도 병사들이 바로 쳐들어왔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병사들이 뒤쪽 문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궁의 뒤쪽에는 아직 병사들이 없었다. 아무 방해 없이 그가 도달한 곳은 어릴 적 늘 궁 밖으로 몰래 빠져나갈 때 사용하던 통로 앞이었다. 굳건하고 높게 선 벽 아래로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벼락이 살짝 무너져 나간 흔적이 있었다. 어느새 몸이 많이 커버려 평소라면 저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의문부터 들었을 터인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런 고민을 할 겨를이 없었다. 어릴 적엔 제법 넉넉한 구멍이었으나, 이제는 머리와 어깨, 골반이 제법 빠듯하게 빠져나간다. 옷가지와 맨 손이 돌에 긁히면서 약간의 상처가 났으나 쿤은 개의치 않고 재빠르게 발까지를 마저 빼내어 곧장 몸을 일으켰다. 척 보기에도 험준해 보이는 산 앞에서 그는 망설이다가 다시 겉옷을 벗어 내 수풀 사이로 묻어두었다. 아무리 밤이지만 반짝이는 푸른 비단으로 이루어진 옷은 위험했다. 이쯤 숨겨두면 도망가다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혹은 기마병이니 저를 찾아 이 산을 올라오진 못하겠지 싶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아예 돌을 들추어 그 안쪽으로 옷을 밀어넣은 쿤은 다시 한 번 몸을 일으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 많은 말과 병사들이 궁의 앞쪽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에, 달리듯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쁜 숨과 함께 귀 옆으로 땀방울이 맺혀 흘렀다. 완전히 정상까지 가야 안심이 될 듯 했다. 정상에 있어야 누군가 올라오는 걸 가장 먼저 발견하고, 반대 방향으로 피할 수가 있을테니. 쿤은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 정상에 거진 다다른 뒤에야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커다랗게 놓인 평평한 바위 위로 몸을 던지듯 누인 쿤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가슴팍이 떨릴 정도로 높에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정신없이 오르기만 하느라 안정을 찾을 수 없던 숨이 조금씩 안정된다. 바위 위에 누운 채로 마주본 하늘은 피바람이 불어닥쳐 거의 풍전등화와 같은 궁의 모습과는 다르게 조용하고 평온해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새카만 하늘이었다. 검은 색이지만,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아 차라리 깨끗해 보일 정도로. 쿤은 숨이 마저 진정될 때까지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문득 노파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는 듯 했다.
쿤은 다시 몸을 일으켜 이번에는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위치를 점하고 나무 뒤로 몸을 숨긴 채 아래를 내려다 봤다. 굳이 힘들게 찾을 필요도 없이 가장 크고 으리으리한 궁전의 모습이었지만, 더군다나 이제는 불이 붙은 듯 화염에 휩싸인 모습은 눈에 띄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이미 제가 빠져나올 때 앞쪽 방에 머물러 있던 황자들이 모두 당했다면, 게다가 저렇게 불까지 났다면 이미 승산이 없었다. 이럴 때는 버림받은 처지인 게 차라리 다행이군, 싶어 쿤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모두 죽고 저밖에 남지 않았다면, 이 왕족이 이대로 멸망한다면, 어떻게 되는걸까. 화염을 눈 안에 담은 새파란 눈동자가 기약 없이 움직임을 멈추고 궁을 응시한 채 한참을 깜빡이기만을 반복했다. 대체 왜? 쿤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비가 적은 편도 아니고, 이토록 굳건하게 유지되어오던 왕좌가 이렇게 한 순간에? 허무감이 밀려왔다. 어릴 적부터 그렇게 망하라고 저주를 퍼붓긴 했지만, 이렇게 망하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망연해 있는 사이, 고요하던 뒤쪽에서 갑작스럽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쿤이 뒤를 돌았을 때 마주한 것은, 그가 예상한 작은 야생동물 따위가 아닌 한 명의 병사였다.

“이 쪽으로 올라오셨을 줄은 몰랐네요, 황자님.”

긴 갈색 머리를 하나로 틀어올려 묶고, 옆에는 칼을 찬 모습이 분명히 반란군의 병사였다. 쿤은 꾹 입술을 내리물었다. 황족에게 내려오는 푸른 머리칼과 푸른 눈은 어떻게해서도 숨길 수가 없었다. 그가 보자마자 자신에게 황자라고 부른 것도 그러한 이유겠지.

“...... 나는 황자가 아니야.”

“쿤 가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건가요?”

“왕이 될 사람이 아니었어. 잘못 찾아왔다고.”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한 그에게 쿤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사실이었다. 자신은 이미 버림받은 처지나 마찬가지인 자식이었다. 황족이기는 했으나, 황족의 대접을 받지 못했던, 왕좌를 이을 사람도 아니었던 사람.

“정확히 다음 대를 이를 황자를 찾기 위해 온 것은 아닙니다, 쿤 가의 일족을 모두 멸하기 위해 온 것이지요.”

그런 쿤의 속내를 꿰뚫듯 말하며 남자는 이제 완전히 쿤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긴 앞머리가 흩날리며 그의 눈동자가 뚜렷하게 빛났다. 거의 궁 안에서만 살아왔던 쿤에게는 낯선, 금색의 눈동자였다. ‘아가야, 두 눈으로 태양을 마주하려고 하지 말거라. 태양은 우리 눈을 멀게 하지.’ 문득 쿤은 노파의 말을 생각했다. 태양을 닮은 눈동자였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죽었어?”

“... 그렇습니다.”

그래. 묘하게 그의 말투에 담긴 것은 아쉬움이나 슬픔이 아니었기에, 비올레는 빤히 눈 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딱 봐도 나이가 어렸다. 궁을 마지막으로 돌며 수색하던 중 살짝 들린 바위 아래서 발견했던 황자의 복식. 푸른 비단에 은색 실로 용이 자수 놓여 있던 옷은 분명 황자의 옷이었으나 크기가 작았다. 이미 죽어나간 황자들에 비해서 나이가 한참 어리겠구나 싶었다. 그런 그가 옷만 남겨두고 사라졌다, 라는 사실에 비올레는 다른 이들을 모두 물리고 저 혼자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저희가 죽인 쿤 가의 사람 중 이렇게 어린 이는 없었으니, 아마도 산 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쿤 가를 모두 멸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비올레는 계속해서 갈등하고 있었다. 아직 이렇게나 어린 사람을 베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그는 예상한 나이보다 훨씬 침착하고, 성숙한 모습이었다. 체구가 조금 작아보였지만 총명함이 그대로 투영된 눈동자나, 적을 보고도 전혀 떨리지 않는 목소리에서 그는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단순한 버림 받은 황자가 아니다. 진정 자격이 있는 황제는, 저희 쪽이 아니라... 비올레는 칼 위에 두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쿤의 눈동자가 그의 손끝을 좇았다.

“저희 병사들은 해가 뜨면 물러갈 겁니다. 다만 저희는 그저 원한이 있는 쿤 가의 사람들에게 그 원을 갚으러 온 것일 뿐, 새로운 왕을 추대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 그런 얘기를 왜 하는데?”

“저는 이 곳에서 황자를 본 적이 없다고 전할 예정입니다.”

“뭐?”

그저 저를 만난 적이 없던 것처럼, 그렇게 지내시다가,

“새로운 왕이 되어주시면 됩니다.”

비올레는 여전히 뭐? 하고 물으며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쿤을 그대로 남겨두고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 가기 위해 뒤를 돌았다가, 멈칫하고 다시 쿤을 마주보았다.

“이건, 아래에서 발견한 황자님의 옷입니다. 추우실테니 걸치세요.”

비올레가 건넨 옷을 받아들줄도 모르고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그러나 날카로운 표정을 한 쿤에게로 성큼 다가간 비올레는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뻗어 올려 그의 어깨 위로 다시 옷을 둘러주었다. 비올레에게서 제게로 옷이 넘어오는 순간 쿤은 비릿하게 풍기는 피냄새를 맡았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당연하게 미래를 가정해버린 비올레는 다시 물러나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 피바람이,
너를 황제로 만들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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