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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올레쿤] 명암의 적 02

[올레쿤] 명암의 적 02

w. 쿠엔

  쥬 비올레 그레이스. 검색.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일주일 내내 반복되는 검색 패턴에 질려버린 쿤이 으,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름을 알려 줬으면 뭐해, 결과가 하나도 안 나오는걸.
쿤은 비올레를 마주한 그 날 이후로 곧장 비올레의 정보를 얻어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정보 쪽에 있어서도 밀리지 않을 경찰 소속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여기 저기 정보를 캐러 다니던 쿤에게 연이어 찾아온 것은 좌절감뿐이었다. 비올레의 대략적인 소속이 마피아 쪽 일거라는 경찰의 직관으로 이리저리 정보를 구하려고 부단히 애를 써 보았지만, 이미 정보 쪽에서도 대가와 손을 잡았는지 깔끔하게 아무 정보도 나오지 않는 것은 차라리 당연해보여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쿤은 업무 시간이 지나고서도 곧 불이 날 것 같이 과열된 컴퓨터를 붙들고 제 정보통을 들쑤시다가, 결국에는 경찰 소속은 아니지만 항상 제게 도움을 주던 형제인 하츨링에게 정보를 의뢰했다. 가끔 물어다 주는 정보에 돈을 준대도 싫다, 직업에 도움을 주겠대도 싫다, 그저 싱글싱글 웃으며 네가 가져다주는 일이 재미있으니 어디까지나 괜찮다고, 그러나 나중에 필요할 때 부르면 반드시 도와달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제게 필요한 정보를 잘 가져다주던 하츨링은 제법 도움이 될 때가 많았다. 그 파란 변태에게 어떤 식으로는 빚을 지는 건 껄끄러운데, 싶어 정보를 의뢰 전에 여러 번 고민했지만, 아무 정보도 찾지 못한 쿤에게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는 제가 아는 한 최고의 정보원이었으니까. 역시나 쿤에게 ‘쥬 비올레 그레이스’라는 말을 전해들은 하츨링은 무언가를 아는 듯한 태도를 해 보였다.

“쥬 비올레, 뭐더라. 잠깐만, 적어뒀는데...”

- 쥬 비올레 그레이스?

“알아?”

- 알긴 뭐, 조금. 이름은 익숙하지.

“정보가 필요해.”

- 곤란한 애랑 얽혀버렸잖아, 우리 동생이?

곤란한? 쿤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곤란하다고 해도 이미 되돌릴 수도 없는데다가, 하츨링의 말은 별거 아닌 걸 전달할 때에도 늘 의미심장한 면이 있었다. 쿤은 대수롭지 않게 하츨링의 말을 넘겨짚고 제 일정표를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언제쯤 가능해?”

- 정확히 뭐가 필요한데?

“그런 거 없어. 그냥 구할 수 있는 전부 다.”

- 오, 그렇단 말이지. 알았어. 연락할게.

하츨링이 통화를 끊으려는 태세를 취하자 쿤은 전화가 끊어지기 전 최대한 빨리, 하고 급하게 덧붙였다. 전화를 하는 와중에도 곁에서 들려오던 효과음을 보아하니 게임에 정신이 팔려 있는 건 여전한 듯한데, 언제쯤 정보를 물어다 줄지. 기약은 없어도 성과는 확실한 쪽이라, 맡기고 나니 오히려 속은 편했다. 쿤은 그제서야 주섬주섬 퇴근할 준비를 하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한 쿤은 자리에 잠시 앉지도 않은 채, 다음 날이 주말인 것을 확인하고 입던 경찰복을 세탁에 맡기고자 집 밖으로 나섰다. 기왕 나간 김에 여가 시간을 좀 보내볼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옷을 맡기고 제가 사는 집에서 조금 걸어가면 금방 드러나는 커다란 시가지에서 익숙하게 골목으로 꺾어진 쿤은 큼지막한 건물의 두 세층이 하나의 펍으로 이루어진 가게 안으로 걸음을 들였다. 쿤의 일과는 주로 사무실, 집 등으로 단조로운 편이었고, 어쩌다 외식을 하러 가도 혼자 가는 편이었기에 집에서 먼 곳으로는 가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그에게 집 근처에 최근 들어 생긴 펍은 안성맞춤이었다. 큼지막하고 깔끔한 데다 사람이 많아도 항상 자리가 있었고, 시끄럽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붐비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쿤은 외식을 하러 나가면 항상 그 펍에 들르곤 했다.
쿤이라고 휴일에 술을 즐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혼자서였다. 애초에 사람들과 몰려다니며 부어라 마셔라 시끄럽게 떠들고 몰려다니는 것은 제 취향이 아니었다. 쿤에게는 사람들과 어울려 떠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는 혼자 조용한 곳에 가서 원하는 술을 즐기며 몸과 마음을 녹이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인 여가 시간이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에서, 쿤은 늘 시키던 스튜 요리와 가벼운 와인을 주문한 뒤에 자리를 찾기 위해 돌아서서 한 층을 천천히 돌았다.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고,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쿤의 습성 상 그는 항상 앉던 플로어의 끝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편한 소파 좌석이 둥근 탁자를 둘러 싼 형태로 된 좌석은 묘하게 다른 좌석들이나 스테이지와는 분리된 좌석이었다. 처음에는 좌석이 마음에 들어 바라보았다가, 쿤은 그 안에 누군가가 이미 자리하고 있음을 알았다. 천천히 가까워질수록, 구두만 보이던 남자의 모습이 다리, 그리고 허리를 지나 얼굴까지가 드러나자 쿤은 좌석과 가까운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의 모습이 너무나 낯이 익었다.

긴 갈색 장발에 감색 양복. 다만 그의 상징과도 같이 강렬하게 눈에 띄던 붉은 넥타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착장을 제외하고서도 압도적으로 훌륭한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쥬 비올레 그레이스. 잊을 수가 없는 얼굴과 이름이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대립 상황에서도 제게 웃어보이던 얼굴이 잠시 눈앞에 떠오르자, 황급히 고개를 내저은 쿤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 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쉬러 온 건 맞지만,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봐.”





하루의 업무를 마친 비올레에게 마지막으로 연락이 온 것은 저녁이 가까운 시간에, 진성에게서였다. 퇴근을 하기 위해 자켓을 입고, 가방을 들기 위해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힌 상태였던 비올레는 다시 허리를 펴고 연락을 확인했다.

- 비올레.
  우리쪽에서 맡은 시설 관리 한 번 확인 해줘. ■■ 거리에 새로 잡은 쪽.

간단한 연락과 더불어, 일정이 바쁘면 다음 날 방문해도 된다는 말을 진성은 덧붙여 놓았지만, 진성이 직접 연락을 취한 자체가 빠르게 일을 봐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비올레는 바로 들르겠다는 답신을 바로 보내놓았다. 조직에서 인수한 기업의 관리만 한 번 확인하는 정도는 어차피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아는 비올레는 진성이 이야기한 쪽으로 바로 행선지를 바꾸었다. 큰 시가지에 위치한 펍은 비록 마피아의 소속 아래 있었지만 영업 자체는 꽤 자유로운 편이었으며, 다른 여느 가게와 다를 바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 확인이라고 해 봤자 얼굴을 비추는 정도 였기에, 비올레도 이 쪽으로 확인 요청이 내려오는 경우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방문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저도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방문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휴식이라면 휴식이었고 비공식적 일과라면 일과였다.
비올레는 펍에 들러 간단하게 확인을 마친 후에 당연하다는 듯이 바텐더가 건네는 위스키를  건네받았다. 한가한 시간이니 좀 더 쉬고 가라는 말에 굳이 마다하지 않은 비올레는 구석에 자리 잡은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느린 템포 위에 다소 높은 음이 얹어지는 재즈 음악을 들으면서 비올레는 소파 안쪽으로 깊숙이 몸을 기대고 앉아 나직이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정신없이 일과를 처리한 하루였다. 바쁘게 일을 처리할 때는 오히려 느끼지 못했던 피곤이 몸을 앉히자마자 몸을 지배해왔다. 불편하게 목을 옥죄던 넥타이는 풀어 정장 주머니에 넣어버린 지 오래였다.
피곤한 몸에 독한 술이 빠르게 들어가 훅 끼쳐 오르는 술기운이 천천히 예민해 있던 신경을 잠식해갔다. 한 잔 술로 취하진 않았어도 몸과 마음이 풀어지는 찰나였다.

“이 봐.”

 익숙한 목소리에 비올레가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어느새 제 앞자리에 앉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와 손끝을 가지고선 탁자를 탁탁 손으로 치고 있는, 그였다.

“또 보네요?”

“너,”

“오랜만이에요.”

정말로 순진무구하다는 표현이 맞는, 호의와 친절로 웃어오는 금빛 눈동자를 보자마자 쿤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다짜고짜 비올레에게 다가가서 장본인에게 위험한 정보를 얻어 보려는, 대담하다면 대담하고 까끌하다면 까끌한 쿤의 말허리를 솜씨 좋게 끊은 유연한 말솜씨에 비해서 참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였다. 도저히 무자비하게 사람을 찍어 누르고 밀어 던지던 모습이 오버랩 되지가 않았다. 눈앞에서 본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쿤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내젓는 사이, 비올레는 가볍게 웃으며 제 앞의 잔을 마저 비우고 아무 말이 없는 쿤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일하는 중은 아니신 것 같네요.”

이런 옷이 더 어울려요. 아는 친구에게 친근하게 칭찬해주듯 비올레의 말투는 쿤에 비해 훨씬 누그러져 있는 편이었다. 쿤은 일을 해 볼 생각이었지만, 비올레에게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비올레는 한 눈에 쿤이 일하는 중이 아닌 것을 알았다. 날카롭게 저를 부르던 목소리에 비해서 쿤의 차림은 캐주얼했다. 저번에 볼 때는 경찰복을 갖춰 입은 차림이었는데, 이번에는 편한 셔츠에 얇은 가디건 차림이었다. 푸른빛이 도는 머리도 단정하기는 했지만 훨씬 부드럽게 결이 살아있는 상태였다. 누가봐도 가볍게 저녁을 먹으러 온 차림이었다. 아예 이곳에 비올레와 함께 앉을 생각이 없던 쿤과 다르게, 비올레는 사람을 시켜 쿤의 음식을 이쪽으로 내오라고 지시하는 중이었다.

“옷을 봐서 알겠지만.. 일하는 중은 아니야. 하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지금 네 정보를 찾으려고 일주일 내내 고생중인데, 그냥 이 기회에 직접 물어보는 게 몇 배는 더 빠를 테니까. 쿤은 잠시 긴장한 입술을 훑었다. 어느 누가 제 정보를 바로 상대편에게 넘겨주겠는가. 쿤도 여러 번 겪어 보아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비올레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파고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자, 쿤의 날카롭게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가 시리게 빛났다. 세공되지 않는 보석의 단면이 날카롭듯이 눈동자의 이채가 형형하게 빛을 냈다.

“저에 관한, 정보요?”

그러니까 당신의 직업에 도움이 될 만한, 그런 정보를 말해달라는 건가요? 비올레는 낮게 웃었다. 저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우리 둘 다 일하는 중은 아니잖아요. 일을 떠나서, 사적인 이야기는 어때요?”

“그런 거엔 관심 없,”

“제 또 다른 이름은 스물다섯번째 밤이에요.”

아 물론, 이 이름으로 찾아보셔도 나오는 정보는 없을 거에요. 이때는 오히려, 아주 평범하게 살던 때의 이름이니까요. 술에 취한 건지 술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운을 떼는 동작이 조금 느릿했다. 게다가 꺼내는 말이라는 것도 쿤이 생각하기에는 아주 감상적이었다.

“제 아명이에요. 이곳으로 들어오고 나서는 그 누구도 불러주지 않았고, 불러주길 원치도 않았었구요.”

“... 그런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거야?”

“글쎄요.”

어쩌면, 불러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생긴 건 아닐까요. 제 생각임에도 확신 없이 말한 비올레는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쿤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자니, 언제는 공적으로 대한 것처럼. 싸움판 한가운데서 붙잡아놓고 생글생글 웃던 주제에. 조용한 음악 아래 가만히 눈을 내리감은 비올레의 모습은 이전에 보던 모습들과는 다르게 퍽 고요하고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당장에라도 수갑을 꺼내들 수 있는 쪽은 쿤이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같이 들게 하는 묘한 모습. 결국 쿤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자리를 정리했다.

“... 더 이상 캐물을 생각 없어졌으니까, 알아서 쉬다 가든지 해.”

“역시 당신은 좋은 사람이네요.”

좋은 사람? 역시?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머릿속에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쿤은 굳이 묻지 않은 채로 이제는 눈을 뜨고 빤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비올레의 눈을 마주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전히 알 수 없는 금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자리는 제가 비켜드릴게요, 천천히 쉬다 가세요. 분위기가 좋은 펍이거든요.”

“너는?”

“저는 이제 가보려구요. 집에 가서 할 일이 있거든요.”

오늘은, 스물다섯번째 밤의 기일이어서요. 비올레는 마치 오늘이 몇 월 며칠 무슨 요일이라는 말을 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네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올레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기까지 버퍼링이라도 걸린 듯이 얼어 있던 쿤이 믿을 수 없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마주한 것은 저를 위해 나온 따끈한 음식과, 그 음식들이 이미 계산되었다는 종업원의 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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