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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밤쿤] 사랑의 색

[밤쿤] 사랑의 색

w. 쿠엔

온통 소리뿐이던 세상이, 온통 모양뿐이던 세상이 한 번에 흔들리던 때가 있었다. 곧 무너질 것처럼 옷을 갈아입던 세상은 순식간에 여태껏 본 적 없는 빛을 가지고 새롭게 세워졌다. 가장 먼저 사랑하게 된 것은 빛을 가진 세상이 아닌 세상에게 빛을 입혀준 사람이었다. 눈이 부시게 반짝이던 태양, 그 하늘에서 내려온 빛을 간직한

쿤에게 세상은 본래 그런 것이었다. 튀는 구석, 모난 구석 하나 없이 흑백으로 비치는 세상은 처음부터 그래왔기에 특별할 것도, 부족할 것도 없었다. 무엇이든 있다가 없어져야만 그 사이의 공백을 알게 되는 법이라, 처음부터 무채색인 세상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쿤은 딱히 세상의 다채로운 색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흑백으로 보는 세상이 얼마나 무미건조하느냐고 위로처럼 건네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그저 너희의 세상과 다를 바 하나 없이 아무렇지 않다고 대꾸할 수 있을 정도로. 딱 하나라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야만 색을 볼 수 있는 쿤에게 운명의 상대를 찾아주겠다고 당차게 이야기하는 친구들을 모두 만류할 정도로 쿤은 색채에 대한 집착이 없는 편이었다.
세상에 색이 없다곤 해도 사회성이나 인복은 아주 훌륭한 편인 쿤이어서, 주변에는 늘 친한 동기들이 가득했다. 그 중 쿤이 세상을 흑백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이수나 왕난이 전부였지만.
대학에 들어오기 전, 어렸을 적에는 제법 쉽게 자신의 세상은 흑백이더라는 이야기를 꺼냈던 쿤은 그 후에 쏟아지던 수많은 질문세례와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불편한 간섭과 이죽임들을 겪어 본 후로 제 세상을 드러내지 않았다. 같이 다니는 동기들이 못 믿을 만하다는 건 아니었지만 비밀 아닌 비밀에 가까웠기에. 비밀이라는 것은 항상 아는 사람이 늘어가면 서서히 그 이름을 잃게 된다는 것을 쿤은 잘 알았다.
푸르르다는 하늘, 화려하다는 놀이기구, 알록달록하다는 꽃들. 흘러가는 이야기들을 넘겨 짚어가며 쿤은 동기들을 따라 놀이공원에 난 오솔길을 걸었다. 푸르다는 묘사를 들어도 떠올릴 것이 없으니 당연했다. 모처럼의 나들이라며 신이 난 동기들 사이에 끼어 발걸음을 맞추며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사람들과 나무들이 같은 색으로 얽혀 있었다. 놀이공원이야 늘 사람이 많은 곳이기는 하지만 주말이어서인지 그날은 유난히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복작이는 풍경은 색이 없는 공기로 느끼기에도 화기애애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네 운명의 상대를 만날 확률이 높으니 열심히 사람을 찾아보라는 말은 질리도록 들어본데다가, 그렇게 운명의 상대를 만날 확률은 미신에 가까울 정도로 낮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쿤에게 그런 말은 귓등으로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유난히 그 날은 계속 사람들에게 신경이 쓰였다. 북적이는 사람들의 얼굴로 계속 시선이 갔다. 하나 둘 짚어가며 얼굴을 바라봐도 모두 무채색이었다. 뭘 새삼스럽게. 쿤은 얼핏 실망감과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것 같은 자기 자신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조금 벌어진 동기들과의 사이를 좁혔다.

“쿤! 이거 같이 타자!!”

동기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어느새 그들은 놀이기구로 이어지는 줄의 한가운데였다. 쿤은 발걸음을 뒤로 물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별로.”

“그럼 놀이동산엔 왜 왔냐!”

“내가 어지럽게 도는 놀이기구는 싫어한다고 했잖아. 다음 놀이기구는 니가 무서워하는 걸로 타러 갈 거니까 이번 거 탈 때 즐겨둬라.”

동기들에게 휙 손짓을 하며 쿤은 놀이기구의 앞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놀이기구를 빙글빙글 움직이게 하는 기계가 막 움직이려는 참이었다.

“쿤!! 그럼 내 가방 좀 들어줘!”

“죽을래?”

쿤은 제 가방을 맡기려는 왕난에게 다시 가방을 집어 던져 넣으며 히히 거리는 얼굴을 죽 밀었다. 어느새 놀이기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들이 엄마나 아빠에게 손을 흔들 듯이 쿤에게 손을 흔드는 신난 얼굴들을 보며 쿤은 대강 손을 흔들어주고 옆으로 물러섰다. 목이 마른 참에 동기들이 놀이기구를 탈 동안 마실 걸살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던 쿤은 사람이 너무 많아 멀리 가거나 특정 커피숍을 찾는 일을 쉽게 포기했다. 아무데나 사람이 적은 곳으로 다녀오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낸 쿤은 곧장 왼쪽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큰 길에 비해 골목에는 사람이 확실히 적었다.
한적한 거리를 잠시 음미하며 걷던 쿤은 바로 앞 가게로 들어갔다. 훅 시원한 기운이 끼치는 가게 안은 사람이 더 적어서 쿤의 마음에 들었다. 카운터 앞에서 메뉴를 보고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쿤은 진동벨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손으로 진동벨을 만지작거리며 동기들이 놀이기구를 다 탈려면 얼마나 걸릴지 계산을 해보려는 찰나 진동벨은 곧장 울리기 시작했다. 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의 외부에 자리한 픽업대로 다가가자, 직원은 메뉴가 준비되었다며 음료 두 잔을 동시에 놓고 사라졌다. 두 잔? 색이 보이지 않는 쿤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두 사람의 메뉴가 동시에 나온 모양인데, 색이 구분되지 않는 쿤에게 두 음료는 완전히 똑같아보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하나를 마셔볼까 하는 생각에 왼쪽 음료를 집어 드는 순간, 저기요, 하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혹시 아메리카노 시키신 거 아니신가요? 지금 들고 계신 게 제 음료인 것 같아서요.”

저는 라떼를 시켰는데... 쿤은 제가 마시기 전에 다른 음료의 주인이 와 준 것을 감사하며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기 위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순간 순식간에 흑백이었던 세상이 하늘에서 쏟아내리는 빛에 젖어 색색깔로 변했다. 놀라울 정도로 한 순간에 수십 수백의 색으로 물드는 풍경이 빛의 폭발처럼 솟구쳤다. 푸르르다는 하늘이, 울창한 나무들이, 알록달록한 꽃들이, 그리고 제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이.
난생 처음 마주한, 생동감이 넘치는 빛을 가진 눈빛이 반짝이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쿵, 하고 색이 폭발하는 광경 속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앗! 죄송해요. 그, 놀라게 해드리려는 건 아니었는데!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그 제가..”

쿤이 놀라 손에 든 음료를 그대로 놓쳐버리는 것을 급하게 받아든 남자의 목소리에 쿤은 다시 한 번 의식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눈을 감았다 뜨는 그 순간 세상에 색이 다시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눈앞에 선 남자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답지 않은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쿤이 다시 눈을 뜰 때까지도 눈 앞에 남자는 그대로 제 앞에 서 있었고, 그가 몰고 온 화려한 색들도 그대로였다. 멍하니 서 있는 쿤 덕분에 당황한 건 쿤의 눈 앞에 서 있는 남자였다. 안절부절 못하고 음료 두 잔을 모두 들고 선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쿤은 아메리카노보다 훨씬 연한 빛을 한 라떼와 닮은 남자에게서 제 아메리카노를 받아들었다.

“감사해요.”

“아니, 아니에요. 하하,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여전히 남자는 쿤이 음료를 바꿔 가져간 것을 말한 제 목소리가 쿤을 놀래킨 줄 알고 연신 사과를 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오는 동안 쿤이 고개를 돌리는 곳곳마다 색이 물들어갔다. 쿤이 느끼기에 그 가운데 선 남자는 온갖 화려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빛이 났다.

“저기요.”

“...네? 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돼요?”

얻기 전까지는 몰랐던 것이 순식간에 들이치는 순간 더 이상은 잃을 수 없었다. 그토록 찬란하다는 색을, 그 빛을, 느끼며 쿤은 그제야 다른 이들이 왜 제게 색을 찾아주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온통 반짝이는 빛들의 총천연색 아래 서 있는 남자는 세상의 색을 모두 가진 것처럼 빛이 났다. 색은 이렇게나 설레는구나. 쿤은 낯설음의 한가운데서 생각했다.

“제 이름은.. 스물다섯번째 밤이에요.”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동자, 부드러운 색을 가진 남자를 보면서 색에 눈을 뜬 쿤은 그렇게 저도 모르는 새에 사랑에 눈을 떴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색이라는 정의를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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