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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밤쿤] 밤의 손님

- 쿤른전력, '밤의 손님' , '편지'

[밤쿤] 밤의 손님

w. 쿠엔

창문부터 방문까지를 꼭꼭 걸어 닫은 푸른 기와집 문 안으로 옅은 촛불만이 일렁였다. 흩날리는 꽃잎이 우수수 마당으로 쏟아지는 초저녁 때까지도 닫혀 있던 창문이, 그 창틀에 바르게 발린 창호지를 늦은 밤의 바람이 계속해서 두드려 댈 쯤에서야 빼꼼 열렸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난 뜨거운 감각의 여운까지도 사라진 밤이었다. 은빛 달이 새카만 하늘에 박아 놓은 듯이 반짝이는 때에 다다르자 쿤은 창문에 이어 방문까지도 열어젖혔다. 이 시간이 되어야 제 집의 사람들이 모두 잠이 들었고, 그래야 문을 열고 마당을 마음대로 거닐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시비들에게 왼쪽 담장 쪽을 쓸지 말라고 하며 접근을 금지시킨 이야기는 곧 아버지의 귀에 들어갈 것이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일주일?
쿤은 조심스럽게 신을 꿰어 신고 마당을 거닐며 왼쪽 담장 쪽을 쭉 눈으로 훑었다. 촘촘하게 돌이 쌓인 돌담들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달빛만이 드나들만한 아슬한 틈이 나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오늘도 그 곳에는 자그마한 마음이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둥글게 말린 자그마한 편지를 조심히 끄집어 꺼낸 쿤은 편지를 소매 안으로 능숙하게 감추어 숨기면서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잠에 빠진 집은 고요했다. 다행히도. 사뿐사뿐, 그러나 조금은 재촉하는 걸음으로 종종 걸어 방으로 들어선 쿤이 방문을 다시 닫고, 망설이다가 창문은 그대로 열어두었다. 곱게 뜬 보름달이 밤의 한 가운데를 비추고 있었다. 쿤이 자신이 들고 온 편지가 평소보다 무거운 것에 의아해 하며 편지를 묶고 있는 끈을 끄르자, 툭 하고 그 속에서는 고운 옥색의 가락지가 떨어졌다.

‘달빛과 같이 맑은 그대에게.

내일도 달이 검은 바탕지 위로 어른거리는 시간 즈음에
그대가 지내는 곳에 서신을 두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아름다운 기왓장 위로 달빛이 부서지는 시간 즈음이면 저녁을 드신 후가 되겠지요.
그대의 집 안에는 늘 사람이 많아서
서신을 몰래 전할 때면 누군가가 이 서신을 그대보다 먼저 발견해버리지는 않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함께 담아 넣습니다.
하지만
사모하는 이에게 전하려는 이 벅차는 아름다움이 귀하니, 꼭 전해지리라고 믿습니다.’

정갈한 글씨체의 서신을 바라보며 쿤은 가락지를 만지작거렸다.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이 가락지는 제가 처음 이 서신의 주인공을 만났던 거리에서 보던 물건이었다. 마을에서의 쿤은 여식으로 소문이 나 있는 터라, 얼굴을 눈 아래로 모두 가리고 긴 머리는 부러 드러내며 저잣거리에 나갔을 때, 우연히 본 가락지가 예뻐서 잠시 그 앞에서 방물장수의 물건을 구경하던 찰나 스쳐지나갔던 한 사람이 기억에 남았다. 잠시 눈을 마주친 것뿐이지만 쿤은 확신할 수가 있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문체,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문장에서부터 느껴지는 벅찬 감동의 연서는 분명 그 이의 것이었다.

‘오늘은 설렘을 보태어 전해드렸습니다.
그대를 처음 보았을 적에 그대가 마음을 두었던 가락지를 같이 보냈습니다.
그 날 그대가 잠시 손길을 주던 그 순간에 가락지가 얼마나 더 아름답던지
이 가락지가 꼭 그대에게 가야하지 않겠는가 하던 차에
그대가 그대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다가 결국 오늘 다시 저자에 나갔습니다.
다행히 그 방물장수도, 그 가락지도 그대로 있어
저도 모르게 가락지를 선뜻 손 안에 쥐고 말았습니다.
방물장수가 누구에게 선물느냐고 물었지만 대답은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대같이 아름다운 이를 사모하는 이가 어디 저 뿐이겠습니까.
꽃의 화려함과 낮의 따스함, 밤의 단정함마저 가지고 계신 그대를
이제는 그대의 손에 있을 가락지마저 사모할 것입니다.’

이제는 일주일이나 몰래 밤마다 서신을 주고받으며 종이 너머 일렁이는 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어 버렸지만, 쿤은 처음 서신을 받고 깜짝 놀랐다. 저를 본 사람들이 더러 저를 사모한다고 하여도 바로 자리에서 저를 붙잡거나 말을 붙이려고 한 사람들 뿐이지, 이렇게나 조심스럽게 제게 서신을 전해온 이는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갈하고 담백한 서체에 비해 듬뿍 듬뿍 애정이 묻어나는 서신은 제가 받아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었다. 언뜻 방물장수의 뒤로 마주했던 이는 긴 도포를 두르고 갈색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밖에는 자세히 본 바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아름다운 사람이여. 그것은 이 서신을 받는 저보다도 이 서신을 보내는 이의 마음에서 볼 수 있었다.

‘서신을 주고받은 애타도록 고운 시간이 어언 일주일이 다 되어 갑니다.
언제 다시 그대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당신에게 가락지를 드린 것은 그 모습을 제가 보고자함이 아닙니다.
그저 그대가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곁에 두고 기뻐하셨으면 하는 마음뿐이니
지니고 다니셔도, 그냥 곁에 두셔도, 저는 그저 드린 것으로 역할을 다 함 뿐입니다.

달이 뜨는 밤이 되면 다시 그대에게 서신으로 찾아오겠습니다.’

쿤의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두고서도 그를 여식으로 이야기하고 다녔다.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늘 쿤을 밖에 내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항상 집 안에 두고 그저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도록 두었지만 집 밖으로 나서는 일을 거의 못하게 하였다. 쿤이 어느정도 자라 간혹 저자에라도 잠시 산책삼아 나가기만 하면 쿤을 사모한다며 따라붙는 자들이 여럿 되더라는 것을 시비들에게 보고받은 이후로는 더더욱 그러했다.
혼담이 들어와도 남자의 집에서만 들어오니, 혼례를 시킬 리가 없었다. 쿤의 아버지는 이런저런 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혼담을 치르러 오는 사람들과 그저 술 한 잔 나누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는 그저 돌려보냈다. 아직은 시집보낼 마음이 없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쿤은 방에서 그저 책을 읽었다.
그런 아버지의 처사가 마냥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쿤이 지금에 와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와서 자신이 여식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진다고 해도 제가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성별을 가리고 살아오다가 갑작스럽게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에도 너무 힘들 뿐더러, 혼사를 제대로 치를 수도 없었다. 그저 좋은 집안에서 귀히 자란 아름다운 아가씨가 영원히 마음에 드는 사내가 없어 홀로 지내더라고 소문으로 남는 일뿐이지 않을까.
쿤은 잠시 가락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손가락에 끼워두려다가, 그만두었다. 이 서신을 전해온 자도 저를 여인으로 알고 있을 것이었다. 원하는 걸 손에 넣지 못하는 운명의 사람에게, 원하는 걸 곁에 두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다니. 가혹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밤의 묵직하고도 쌀쌀한 바람이 훅 창문으로 흘러 들어오면서 촛불이 꺼졌다. 촛불 곁에 둔 가락지가 바깥의 달빛을 받고 반짝였다.
한 번도 무언가를 스스로 욕심내 본 적이 없어서, 손에 쥐어본 것도 없었다. 제 손에 들어온 가락지가 처음이었다. 원하는 무언가가 눈앞에,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있다는 것은 그래서 조금은 낯설고도 벅찬 기분이었다. 한 번 쯤은, 끼워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쿤은 다시 촛불에 불을 붙이고, 곁에 둔 붓을 집어 들었다.

‘밤의 서신으로 손이 되어주신 그대에게.

오늘로써 벌써 일곱 번째 그대의 서신을 받아봅니다.
그대가 저를 사모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달빛처럼 매일매일 찾아와 한 가득 저를 비추어드니 기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온전한 제 모습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혹은 사랑받고 싶은 느낌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붓은 느낌을 따라갔다.

‘제게 서신을 주시는 이의 고운 마음과 얼굴을 한 번 뵙고자 하오니
조만간 밖에 다시 나갈 생각이 있습니다.
이전과 다르게 가리는 것 없이 온전하게 그대를 마주하고자 갈 테니
그런 저를 온전히 봐주시려거든 서신을 전해주시던 꼭 같은 시간에
마을을 넘어가는 다리 위에서 뵙고 싶습니다.’

이리 저리 손가락 사이에 끼워보니 우연하게도 가락지는 약지에 꼭 맞아 들어갔다. 쿤은 다짐했다. 한 번도 낸 적 없는 모습을 밖에서 내어보겠다고.

‘이전의 모습을 그리며 나오시기 보다는 새로운 모습을 기대하고 와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나오지 아니하셔도 됩니다.
저는 그저,
그저 소중한 이를 가까이 하고자 하는 마음뿐입니다.’

가락지는 붓을 쥔 손이 움직이는 대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달이 뜨는 다리 위에서 뵙겠습니다.’

두근거림이 얇은 종이 위로의 먹처럼 은은하고 곱게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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