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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밤쿤] 한 여름날의 로맨스

-쿤른 전력, '매미'

[밤쿤] 한 여름날의 로맨스

w. 쿠엔

맴-맴 귀를 울리면서 매미가 째르르르 우는 여름날의 분수대 곁에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날이 더우면 흔히 분수대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대신 오늘 즐비한 사람들은 곧 방영될 드라마의 촬영을 진행하는 일행들이었다. 야외 촬영이 있는 날이어서 혹여나 비가 오면 어쩌나 모두가 마음을 졸였던 것에 비하면 다행히도 날씨는 쨍하게 맑았다. 지나치게 날이 더워서, 촬영을 하느라 땡볕 속에 서 있는 연예인들이며 연예인들을 챙기는 스태프며 할 것 없이 땀범벅이 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날이 너무 덥다, 괜찮아?”

촬영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땡볕 아래 계속 촬영을 하는 쿤이 걱정됐는지 촬영 시트를 들고 있던 이수가 소리를 지르자 쿤은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닥 괜찮거나 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얼른 끝내고 푹 쉬는 게 더 낫다는 것이 쿤이 내린 결론이었다. 햇빛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막 해가 가장 뜨거운 1시경이었다.
쿤은 마지막으로 들린 컷 소리를 듣고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내면서 다음 신을 떠올려 봤다. 잠시 저 혼자 나오는 신이 지나고 나서는 오늘의 하이라이트나 다름없는 장면인, 대낮에 찍기는 또 처음인 키스신이었다. 보통 저녁이나 밤에 자주 찍었던 키스신들을 떠올리며 왜 굳이 낮에 찍느냐고, 피디이자 연출자인 이수에게 물어봤을 때 돌아온 답은 그저 둘을 생각해봤을 때 밤보다는 낮이 더 어울려서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마냥 친구 같은 사이에 키스신이라. 어색한 느낌이 먼저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연기자 선배니까, 라는 생각으로 쿤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밤은 키스신은 물론이고 키스가 처음일지도 모른다며, 대본 리딩 때 짓궂은 농담 같은 말이 나왔을 때 밤은 그저 웃기만 했다. 얼른 친해지라고 툭툭 둘을 떠미는 손에 이미 충분히 친하다고 하던 건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좋은 선후배 사이였다. 아니지, 연기일 뿐인데 이렇게 신경을 쓴 적이 있나? 쿤은 수 없이 찍었던 과거의 키스신 중 단 한 번도 긴장이며 어떤 마음이며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망연해졌다. 연기일 뿐인데, 이렇게나 신경이 쓰여 버리다니. 맴- 맴 작열하는 열기 속에 매미의 울음만이 다시 메아리쳤다.
깊게 빠져있던 생각에서 순식간에 저를 끄집어낼 만큼, 차가운 젖은 수건의 감촉이 목덜미에 조심스럽게 닿는 것을 느끼면서 쿤은 옆을 돌아보았다. 호랑이는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이 소년은 불쑥불쑥 생각만 해도 눈 앞에 나타나서 자신을 놀라게 만들곤 했다. 적신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아주는 밤이었다.

“고마워, 밤.”

“제 생각에도 잠시 쉬고 하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날이 너무 뜨거운데...”

쿤은 저 혼자 나오는 장면을 촬영하면서 그늘진 곳에 잠시 몸을 쉬던 밤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시선을 주던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찍는 장면이 다르고 등장하는 장면이 다르다보니 누군가는 길게 찍는 날이 있고 짧게 찍게 되는 날도 있는 건데, 밤은 늘 쿤보다 먼저 촬영을 끝내거나 쉬게 되면 미안해하곤 했다. 괜찮다고 손을 저어도 굳이 땡볕에서 대기를 하고 있다가 연출진들에 의해 반 강제로 그늘에 들어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채였다. 그래도 시원한 수건으로 머리라도 적셨는지 촉촉해 보이는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 좀 적셨나봐, 잘했네.”

“쿤 씨도 하실래요? 이거 젖은 수건 잠깐 머리 위에 올려둔 건데, 진짜 시원하거든요.”

수건을 머리 위에 올리려는 손을 마다하며 쿤은 웃었다. 밤은 다행히도 워낙 차분한 머릿결을 가진 덕에 머리가 젖더라도 차분한 스타일이 유지되었지만, 저 같은 경우 반나절 고데기를 해서 겨우겨우 완성시킨 머리에 물이 닿았다가는 큰일이 날게 분명했다. 괜찮다고 해도 자꾸만 수건을 건네기에 쿤은 결국 밤이 주는 젖은 수건을 가져다가 다시금 목덜미에 대었다. 새하얀 밤의 수건에 화장이 묻을 까봐 신경이 쓰였는데 밤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쿤에게 수건을  둘러주었다. 얼음물에 적신 듯 시원함이 목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시원하다.”

“마실 것도 가져다 드릴게요.”

“이제 곧 촬영 들어갈 것 같은데, 그냥 끝나고 마실게.”

“아녜요. 목이라도 축이고 해요.”

밤은 후다닥 스태프들 쪽으로 뛰어들어 가더니 시원한 에이드 두 잔을 가지고 나왔다. 어디서 사왔어? 여기 앞에 카페에 아까 코디 누나들이 다녀오셨대요. 둘은 소소한 이야기를 하면서 음료수 빨대를 입에 물었다. 시원한 기운이 몸 안으로도 퍼져나갔다. 조금 살 것 같네. 쿤은 흘끗 이수를 바라보았다.

“촬영은?”

“잠깐만. 금방 들어갈게.”

밤은 어느새 옆에서 젖은 머리를 툭툭 말리고 있는 채였다. 쿤은 이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분수대의 앞 의자에 걸터앉았다. 예쁜 그림을 만들겠다고 분수대 근처를 잡는다는 스태프들의 말에 옷에 물이 튀면 어떡하냐며 걱정하던 게 무색할 만큼 더운 날씨에 시원한 분수대는 제격이었다. 분수대 곁으로 무지개가 어른어른 비추었다. 쿤은 어느새 말라가는 수건을 다시 스태프들 쪽으로 두고 나오며 밤의 손에 들린 음료를 받아들었다. 얼음과 레몬이 동동 떠다니는 에이드의 얼음이 금방 녹을 것만 같았다.

“얼른 마셔. 다 녹을 것 같아.”

“마저 드셔도 돼요. 저는 아까 쉬면서 물 마셔서.”

밤은 쿤이 앉은 분수대 앞 의자에 따라 앉았다. 다음 신이 키스신인 것을 밤도 모르지 않았다. 평소처럼 대화를 하고 있지만 심장이 쿵쾅거렸다. 쿤이 찍은 키스신을 많이 돌려봤다. 너무나 자연스럽던 모습들을 생각하며 밤은 더더욱 긴장이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쿤 씨는 이렇게 안 떨겠지? 나만 떨고 있는 거겠지? 내가 잘 못하면 어떡하지? NG 나면 싫어하시겠지? 맴-맴 푸른 녹음 사이로 매미의 울음이 가득 메워졌다. 뜨거운 열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키스신은 처음이지?”

밤이 찍은 드라마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주연이 처음이다보니 키스신은 처음이었다. 옆에서 멍하게 얼굴을 붉혔다 녹혔다 하는 밤의 모습을 빤히 보던 쿤이 말을 걸자 밤은 화들짝 놀라 쿤을 바라봤다.

“아, 네, 네...”

“내가 알아서 할게, 걱정 하지 말고.”

대본상에서는 밤이 먼저 다가오는 걸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쿤은 제가 먼저 다가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키스신이 처음인 애한테 리드를 하라고 써 놓으면 어떡하자는 거야. 쿤은 속으로 투덜대면서 밤을 바라봤다. 샛노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자신에게 향해 있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느새 흔들림이 잦아든 눈동자였다. 괜찮기는, 쿤이 다시 말하려는 찰나, 앉아서 몸을 받치고 있던 손 위로 밤의 손이 포개어졌다. 손에 닿는 온기에 놀란 눈동자가 손을 한 번 바라봤다가, 밤으로 다시 향하는 찰나 거리가 좁혀졌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청아한 물빛이 분수대에서 흩어졌다. 물에 녹아버릴 듯이 푸른 소다 빛의 머리칼이 옅게 부는 바람에 흐트러졌다. 할 수 있겠어.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를 보면서 밤은 생각했다. 아름다운 모습에, 다가갈 수 있겠어. 망설임 없이 고개를 꺾으면서 천천히 거리를 좁히자, 쿤은 잠시 굳어 있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심장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여름을 꿰뚫을 것처럼, 이 여름을 녹일 것처럼. 밤이 살짝 입술을 맞대고 느릿하게 밀어붙이는 탓에 쿤의 몸이 뒤로 밀렸다. 의자에 놓여 있던 밤의 손이 쿤의 팔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만큼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미묘한 떨림과 숨이 오고갔다. 주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쏴아아 쏟아지던 분수도, 매미의 울음도 아스라하게 멀어졌다. 아까보다 살짝 더 가쁜 호흡만이 귓가로 파고들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아직 촬영 시작 사인이 들어오지 않은 것을 떠올리고 쿤이 놀라 밤을 밀어내려는 찰나, 밤이 몸을 뒤로 물렸다.

“밤, 이거... 리허설이야?”

“네?”

“아직 촬영 안 들어갔을 텐데...”

“...네...?”

“컷!”

갑작스럽게 떨어진 촬영 종료 사인에 쿤은 놀란 표정으로 이수 쪽을 바라봤다.

“지금 마이크도 제대로 안 들어가고, 아직 촬영 시작도 안한 거 아니었어?”

“아니야, 찍고는 있었어. 마이크 점검 중이었는데, 지금 마이크 없이 이대로 화면 써도 될 것 같아. 너무 예쁘게 나왔어.”

볼래? 이수는 모니터링 하라며 밤과 쿤을 나란히 불렀다. 밤은 조르르 돌아가 다시 이수와 함께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쿤은 자리에서 그대로 앉은 채 소리 없이 고개를 떨궜다. 연기 중인걸 잊고 키스했잖아! 말도 안 돼! 쿤 아게로 아그니스가 키스에 빠져서 촬영이라는 걸 잊어버렸다고? 소리 없는 절규 속에서 매미의 울음이 다시 왁자지껄한 스태프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우르르 촬영을 종료하고 장비를 정리하는 사람들 사이로 밤이 다시 쿤의 앞에 섰다.

“쿤 씨, 어서 쉬러 가요.”

네? 태양을 담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내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둘의 모습까지가 마지막 카메라에 담겼다. 비어버린 의자에 물보라로 인한 무지개가 다시 어른거렸다.




Epilogue.

“야, 그 때 NG를 냈어야지.”

“그만한 그림은 다시 찍어도 안 나온다니까! 자연스럽게 예쁜 모습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줄 알아!”

“키스 한 번이라도 더 해봤어야 하는건데!”

쿤 너가 드디어 미쳤구나, 그날 더위를 먹은 게 틀림없어. 제 촬영 날이 아니면 집에 틀어박혀 연락도 씹어 먹기 일쑤인 쿤이 쉬는 날 영상 편집실까지 쳐들어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키스신에서 NG를 내서 밤과 키스신을 더 여러 번 찍어봤어야 한다는 소리라니. 이수는 고개를 저었다. 연애는커녕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지도 않는 편인 쿤이 이러다니 단단히 이상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 날 어떠한 기류가 시작됐는지도 눈치 채지 못하고.

“쿤 씨!”

환하게 웃는 미소가 편집실에 들이치자 이수는 기함을 했다. 야! 밤 너는 촬영하다 말고 여길 왜 왔어 또! 쿤 씨가 여기 계시다길래요! 머리가 지끈거리는 이수를 두고 밤은 쿤을 뒤에서 안은 채로 생글거렸다. 자연스럽게 쿤의 어깨에 고개를 숙여 머리를 기댄 밤의 머리에 쿤도 머리를 기댔다. 자연스러운 자세에 이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너네 조금... 조금 많이 친해 보인다...? 어쩐지 모르게 얼굴이 편 밤과 쿤을 나란히 보던 이수가 모니터를 끄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가! 나가라고! 연애할거면 밖에서 해!”

“저희 연애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뭐?”

기함하는 이수를 두고 쿤은 저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인 밤을 데리고 영상실을 빠져나오면서 말했다. 괜찮아, 밤. 쟤는 아무것도 몰라. 키득거리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이수는 망연자실해졌다. 드라마를 만들려다가 연인을 만든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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