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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올레쿤] 그리움의 색

-신의탑 60분 전력, '무기'

*쿤이 비올레와 마주쳤을 때 비올레가 밤인 걸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리고 쿤과 올레가 함께 그 곳을 빠져나와 서로 모르는 상태로 같이 지낸다면 어땠을까 싶어 그런 상황을 가정하고 쓴 글입니다.


[올레쿤] 그리움의 색

w. 쿠엔

삼류 악당의 흉내를 내던 슬레이어 후보 놈은 어디에 가서 쉬고 있을까, 쿤은 제게 주어진 방 안에서 편하게 몸을 뉘이면서 생각했다. ‘긴 장발의 머리카락까지만’ 이 그 흉흉한 소문에 부합하는, 생각보다도 연약한 성정을 보여주던 슬레이어 후보는 결국 저를 데리고 아를렌의 손을 빠져나왔다. 연신 저를 직접 마주하는 걸 피하면서 아랫사람들에게 시켜 ‘쿤 씨에게 방을 내어 주세요.’ 라고 말하던 슬레이어 후보는 급하게 층을 옮겨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권위주의적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사소한 것 하나까지 아랫사람들에게 지시하여 저를 안내하도록 하는 모습에 저렇게 권위를 부리던 사람인가 싶어 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알 수 없는 놈이야. 어찌 되었든 나쁜 놈이라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는 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FUG 슬레이어 후보라는 사람이, 방금 십가문의 자제인 그를 죽이려던 사람이 그에게 내어준 방 치고는 상태가 상당히 좋았다. 어느 감옥에 가두어 놨더라도 그러려니 했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비올레가 쿤을 데려온 곳은 비올레 자신이 머무는 FUG의 숙소였다. 아마도 그냥 제가 머무는 곳에 인질로 삼으려 데려온 것이겠지, 아니면 FUG들 사이에서 스트레스 받아 죽으라는 이야기든가. 하고 어디까지나 비틀린 생각만이 들기는 했으나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한 의아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가만히 방 안에 누워 있으니 머릿속은 저절로 급박하던 상황을 되감기하듯 재생했다. 쥬 비올레 그레이스. 뒤를 도느라 흩날리던 갈색 머리카락, 얼굴을 절반까지 덮어 내려올 정도의 답답한 앞머리. 앞머리가 흩날리던 순간 마주한 것은 놀랄 정도로 선연한 금빛의 눈동자였다. 무겁게 침전하듯 가라앉은 금빛 눈동자는 제 마음에 들어와 박히듯이 새겨졌다. 순간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어.
왜 그래, 금빛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많잖아. 쿤은 스스로를 달래듯이 중얼거렸다. 놀랄 것 없어. 그냥 금빛 눈동자를 가진 FUG의 슬레이어 후보일 뿐이야. 금빛은 어느덧 제게 상처를 주고 떠난 흔적처럼 남아 괴롭히는 색처럼 변해 버렸다. 빛 아래 선명하게 반짝이던, 순진하고 어리던 눈동자를 쿤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밤.
심장은 잊지 말라는 듯 다시금 욱신거리게 아려왔다.

쿤은 자신의 주변에 경호원들이 붙어 있지만 그럼에도 제게 꽤 많은 자유가 허락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씻고 나온 후에 바로 잠자리에 들려던 생각을 바꿔 룸 밖으로 나왔다. 곁에 대기하던 경비 인원들이 우르르 따라붙는 것은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목표를 이루는 데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여기서 큰일을 일으켜 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쿤은 묵묵히 걸어 숙소의 지하로 내려갔다.

“이봐, 지하에 뭐가 구비되어 있지?”

“아, 간단한 바와 식당들이 있습니다.”

저희들에게 말을 걸 줄은 몰랐던 듯, 쿤의 물음에 놀란 채로도 쿤의 주변을 에워 싼 경호원들이 쿤의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쿤은 제게 대답해준 사람을 다시 마주보며 말을 걸었다.

“내가 가는 걸 말리지는 않을 생각인가보네.”

“아, 비올레님께서... 쿤 아게로 아그니스 님의 행동이 크게 이곳의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한 제한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쓸데없이 배려심이 좋아.”

내가 어떻게 무슨 일을 벌일 줄 알고. 쿤은 툴툴거렸다. 어쩐지 웬만한 저의 행동 정도는 알아서 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발언으로 들리는 것을 보아 여전히 심사가 꼬여 있는 듯 했다. FUG 의 숙소 내에서 엄연히 위험 인물로 분류되어야 할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제게 자유를 주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쿤은 금세 당도한 숙소의 지하를 가볍게 둘러보고, 가장 사람이 많은 바로 골라 들어갔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가볍게 술을 걸치거나 춤을 즐기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FUG겠지. 이런 곳에 섞여 들어와 있다는 것이 여전히 탐탁지 않았지만, 쿤은 그래도 가볍게 와인 한잔 정도를 즐긴 후에 숙소에 들어가 나른하게 잠들 생각을 하며 바의 자리에 앉았다. 옆에 우르르 서 있던 경호원들은 잠시 저들끼리 말을 나누더니 쿤의 옆에 앉아 자리를 대신 쿤이 있는 곳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행동반경과 개인 공간 역시 지켜주려는 모양이었다.
쿤은 평소 즐기던 위스키를 주문 해 두고 자리에 앉아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제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FUG의 만행도, 지금 이렇게 저를 잡아 둔, 아니 잡아 둔 것인지 풀어둔 것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슬레이어 후보도.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픈 일들이었다. 되도 않는 삼류 악당 흉내를 내면서 센 척을 하더니, 곧 아무말 없이 한참을 서 있다가 저와 함께 아를렌의 손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을 하는 부분이 미묘했다. 성정이 나쁘려면 나쁘던가, 좋으려면 처음부터 좋던가. 답답한 마음에 쥬 비올레 그레이스에 대해 알아보고라도 싶었지만, 신수의 이용이 제한되어 바깥과는 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 등대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주로 등대를 가지고 하던 정보 검색도 불가능했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노트와 펜을 들어 이리저리 끄적거리던 쿤은 가만히 펜을 내려 두었다. 오랜만에 든 만년필에서는 오랜만에 생각하는 이름들이 줄줄이 흘러 나왔다. 밤, 황금빛 눈동자, 밤.
한 잔만 마셔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늘 일을 하는 것이 마음에 평화를 주던 쿤에게 느껴지는 공허감과 시간의 공백은 상당히 컸다. 어차피 돌아가도 할 것도 없는데, 싶어 쿤은 앉은 자리에서 내리 여러 잔을 시켜 마셨다. 평소 시키던 위스키를 시켰지만 워낙 공복인 데다 컨디션이 좋은 편도 아니어서 금방 취하는 기분이 올라왔지만, 될 대로 되라 싶은 쿤은 마지막으로 시킨 잔까지를 모두 비운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청 하는 감각에 머리와 몸이 동시에 흔들렸지만, 주변의 경호원들의 부축을 밀어내며 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얌전히 올라갈 테니까 손대지 마.”

쿤의 말에 곧장 제게서 거리를 벌리는 경호원들을 보고 있자니 픽 하고 웃음이 샜다. 대체 비올레에게 어떤 지령을 전달 받았길래 제 말을 이렇게 잘 들어줄까 생각하며 쿤은 멀쩡하게 걸음을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

“너네는 자러 안가?”

“저희는 쿤 아게로 아그니스님을 숙소까지 모셔다 드려야...”

“됐으니까 퇴근해.”

별 일 없을테니까 안심하고. 쿤은 흘끗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12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신수도 못 쓰는 상태에서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겠어. 지금까지 얌전히 지낸 것만 봐도 알잖아? 내가 부담스러우니까 제발 퇴근해. 왜인지 쿤을 감시하기보다는 쿤을 보호하는 입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경호원들이라 쿤은 손을 휘저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함께 향한 경호원들은 망설이는 듯하다가 쿤이 연신 퇴근하라고 만류하자 결국 꾸벅 인사를 하고 제 각기 뿔뿔히 흩어졌다. 실제로 별 다른 일을 일으킬 생각도 없던 지라 쿤은 얌전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버튼을 눌렀다. 27층이었던가.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아마도 맞겠지 싶어 그대로 기둥에 몸을 기댔다. 온통 금색으로 칠해진 엘리베이터 때문에 또 다시 정신이 아른거렸다. 잠시 눈을 내리감고 있던 쿤은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유난히 조용한 층이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렇겠거니 싶어 쿤은 그대로 제가 머물던 호실로 향했다. 오른쪽 가장 끝 호실이었으니까... 벌컥 문을 연 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

불이 약하게 켜져 있는 호실에 걸음을 들여놓으려던 쿤은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인영을 보았다. 소파 위에 정장 차림으로, 긴 머리를 푸른 채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힌 모습은 아까 마주한 쥬 비올레 그레이스였다. 아마도 호실을 잘못 찾아온 모양이었다. 아까 그냥 데려다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싶었지만 쿤은 이 상황을 굳이 피하고 싶지 않았다. 설마하니 쥬 비올레 그레이스가 머무는 방에 경호 인력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데다가, 이렇게 둘이 마주할 시간이 올 줄은 몰랐다.
새카만 밤색 정장에 붉은 넥타이가 눈에 띄었다. 여전히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건가 싶어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다가가려는 순간, 비올레가 눈을 떴다. 어두운 공간에 홀로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 비올레는 쿤이 제 공간을 침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경고의 말도, 행동도 내뱉지 않은 채 가만히 쿤을 응시했다. 적막한 공간 안에서 쿤은 순식간에 울컥 밀려드는 감정에 그대로 뒤를 돌아 방을 빠져나왔다. 쾅 하고 문을 닫고 나오면서 쿤은 저도 모르게 가빠진 호흡을 골랐다.
그가 가진 힘보다도, 권력보다도, 침전한 듯 그러나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는 흔들림 없는 제 마음을 뒤흔드는 무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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