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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올레쿤] 영원의 찰나, 그 후에

2018.10.31 할로윈 기념 합작 연성입니다!

'밤쿤 교류회: 아무래도 사랑인가봐' 에 냈던 회지 '영원의 찰나' 의 뒷 내용이지만 회지 내용을 모르셔도 이해하시기에 무리는 없을 것 같아요:)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밤쿤) 올레쿤] 영원의 찰나, 그 후에

w. 쿠엔

세월은 그 흐름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유려하게 흘러갔다. 두 달여를 그렇게 마음 졸여가며 보낸 시간들을 비록 잊을 수는 없으나, 그 시작이 얼마나 지나버렸는지 가늠하기 힘들 만큼, 잠시 떨어져 있던 때의 시간이 한 없이 거칠고 무디었던 것에 비해 함께 하는 시간은 거칠 것이 없이 흘러갔다.
뱀파이어가 된 밤은 비올레라는 이름을 새롭게 얻었다. 쿤을 찾아오는 동안 한껏 길어진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은 채로 신체 리듬이 고정되어서, '비올레'는 긴 장발을 위로 묶어 올린 성숙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신체리듬이 멈춘 터라 일일이 말리고 빗는 과정은 생략해도 늘 윤이 흐르는 결 좋은 머리카락이었지만, 비올레는 늘 긴 머리가 신경 쓰이는 모양인지 머리를 묶고 다니기를 좋아했다. 정 거슬리면 자르고 다시 그 모습을 영원히 고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쿤은 이야기 했지만, 비올레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푹신하고 결 좋은 촉감을 좋아하는 쿤이 제 머리카락을 땋거나 빗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제 머리카락을 빗어내리고 매만지는 쿤을 끌어안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하는 건 비올레의 가장 행복한 취미였다. 잠자리에 누울 때 머리를 푸르면 커튼처럼 펼쳐지는 머리 위로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누여오던 쿤을 기억했다. 생생하게 반짝이는 푸른 동공을 마주하며 눈키스를 나누듯 장난도 치고, 끊이지 않는 대화를 나누던 시간들을 기억했다.

“밤, 있잖아.”

비올레라는 이름은 쿤이 지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일하게 '비올레' 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 때 쓰던 이름을 계속 사용할 수는 없으니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겠냐 묻던 밤에게, 쿤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밤이 선물해 주었던 포근한 털 담요에 장식된 꽃의 색인 보라색을 가져다가 밤에게 새 이름으로 붙여주었다. 비올레라는 이름은 제법 더 성숙해진 웃음와 시선을 가진 밤의 이미지와도 맞아 떨어졌다.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름이었지만, 비올레는 꽤 만족해했다. 쿤만은 계속해서 그를 밤이라고 지칭해서 인지도 몰랐다.

“네?”

“오늘이 할로윈이래.”

“할로윈이요?”

“저승계에 있는 오만 것들이 인간 세계에 내려가는 날이지.”

할로윈의 본래 의미는 ‘죽은 자들을 위한 날’이었으나, 어느새 인간 세상에서의 할로윈은 어린이들의 재미있는 ‘Trick or treat’의 세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저마다 독특한 분장을 하고 ‘Trick or treat!’을 외치는 아이들 사이를 유유히 활보하는 수많은 뱀파이어와 귀신들은 그날만큼은 한껏 자유를 만끽했다. 분장을 한 사람들이 많아 정체를 들킬 염려가 없는 터라 더욱이 인간과 장난을 치거나 인간 세상을 즐기는 것에 거리낄 것이 없어서, 할로윈만큼 대대적으로 저승계의 혼령들이 이동하는 날이 또 없었다.

“내려가 볼래?”

“그럴까요? 저는 상관없어요. 쿤 씨가 내려가고 싶어 하신다면 같이 가요.”

“네가 궁금해 할 것 같아서. 네가 살던 곳이잖아. 벌써 몇 백 년이 지났는데, 엄청 많이 변했을걸?”

비올레는 여전히 변한 것 없는 황금빛 이채가 이는 눈동자를 가만히 깜빡이기만 했다. 장난기 어린 쿤의 얼굴이 비올레의 앞에서 갸웃 거리며 내려갈래? 내려갈까? 묻는 걸 그대로 뺨을 붙잡아 이끌어 가볍게 입을 맞추자 쿤의 입가에서 작게 키득거리는 웃음이 터졌다. 쿤의 말대로 이미 뱀파이어가 된 지 몇 백 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쿤은 비올레를 자주 인간 세상에 내려 보내려고 했다. 뱀파이어들 중 누군가가 나서 인간들의 세상에 다녀올 일이 있을 때에도, 가끔 구경삼아 내려갈 때도 쿤은 비올레가 인간 세상에 자주 다녀오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막상 비올레는 인간 세상의 기억이나 감각 같은 건 잊은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생각이 나는 건 아니지만… 함께 다녀올까요?”

쿤 씨가 원한다면. 어느새 분주하게 움직이는 뱀파이어들 사이로 비올레가 눈짓을 하며 말하자, 쿤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마다의 즐거움과 기대감으로 조잘대며 인간 세상으로 훌쩍 내려가는 뱀파이어들을 따라 비올레와 쿤도 손을 맞잡고 그 안으로 끼어들었다.



비올레와 쿤이 내려갔을 때 인간들의 세상은 어느덧 해가 지고 으스스한 밤이 되어 있었다. 창백하게 빛나는 달 아래로 어린이들은 온갖 분장을 한 채 꺄르륵 웃으며 거리를 뛰어다니고, 호박 등은 달보다도 화려하게 빛이 났다. 어른들은 그들 나름대로 분주하게, 분장한 개구쟁이 어린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낮보다도 화려한 밤의 할로윈 거리에는 가지각색의 분장을 한 사람들이, 그리고 분장을 한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아닌 것들'이 함께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죽은자와 산자가 공존하는 거리에서 비올레와 쿤도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어느덧 분장을 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사탕 여러 개를 받아 손에 쥐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알록달록한 막대 사탕부터 자그한 알사탕까지 받아든 비올레는 쿤이 제가 받은 사탕 중 가장 알록달록한 알사탕 하나를 집어먹은 후에 바로 흥미를 잃어버리자 쿤의 사탕도 모두 받아 그러쥐고 있었다. 커다란 왼쪽 손으로는 여러 개의 사탕을 쥐고, 오른 손으로는 쿤의 손을 붙잡은 비올레는 언제든 인간 세상에 놀러오면 흥미로운 것들을 찾아 쏘다니는 쿤을 따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비올레가 인간 세상에 내려오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사실 인간 세상의 볼거리들을 무척이나 즐거워하는 쿤 때문이었다. 몇 백 년 전의 사람들이 모두 죽고 새로운 사람들이 태어나고, 인간들의 세상은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새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물건들, 신기한 빛이 쏟아지는 전자기기들로 다시 달려가려는 쿤의 손을 붙든 비올레는 몇 백 년 쿤과 처음 제 집에서 만난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웃는 채로, 새삼스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 때, 예상치 못한 손님이 골목에서부터 그들의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Trick or treat!”

어린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비올레가 고개를 내렸을 때 보인 것은 어린 꼬마아이였다. 갈색의 단발머리를 한 여자 아이는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자그마한 손을 비올레 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아마도 비올레의 주먹 쥔 손 사이로 빼꼼이 튀어나온 알록달록한 사탕 껍질들을 본 모양이었다. 비올레는 구경을 마쳤는지 어느새 제 곁에 다가와 선 쿤의 손을 놓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똘망똘망한 푸른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사탕을 받고 싶은 꼬마 손님이 왔네요?”

비올레는 허리를 숙이고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어 앉아 꼬마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할로윈 마녀의 흉내를 낸 듯 캉캉 레이스가 화려한 남색 치마에, 높지 않은 굽이 달린 붉은 구두, 손에 든 귀여운 지팡이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비올레는 제 주먹 쥔 손 안에 있던 모든 사탕을 아이의 두 손 안에 가득 쥐어주었다. 순식간에 확 미소가 핀 얼굴로,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네는 아이를 바라보는 비올레의 눈동자가 어느새 아이를 닮은 웃음으로 휘어졌다.

“멋진 지팡이를 가졌네요.”

“나쁜 사람들을 혼내줄 수 있는 마법의 지팡이에요!”

방방 뛸 듯 신이 난 목소리의 꼬마는 제 말을 잘 들어주는 비올레가 마음에 들었는지 조잘조잘 자기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쿤은 불편한 자세로도 한참동안 아이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는 비올레를 바라보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인간 세상이 그립지 않다는 말을 해도, 이제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고 해도 쿤은 그가 인간 세상에 내려올 적마다 생각에 젖은 표정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그리울 수도 있지. 어쩌면 뱀파이어라는 게 지루해 졌을 지도 몰랐다. 자신과 다르게 비올레는 엄연히 인간 이었을 적의 기억과 추억을 모두 가지고 있는 존재였으니까. 비올레는 아이를 통해서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인간일 때의 모습들이 그리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쿤은 비올레가 아이를 아껴주는 모습을 한 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방해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움칠거리는 손끝을 멈추게 했다.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 멍하니 서 있는 쿤의 손끝으로 어느새 비올레의 손끝이 다가왔다. 잠시 손을 놓아둔 사이 금세 더 차가워진 쿤의 손끝을 잡으면서 비올레는 쿤에게 물었다.

“아이와 이야기해 보실래요? 재미있는 아이인데.”

“괜찮아, 네가 많이 이야기 나눠. 혹시 네 어린 시절이랑 닮았어? 난 이런 어린 시절이 없었어서 말이야. 신기하네.”

쿤은 여전히 웃는 채로 비올레의 어깨를 툭툭 격려하듯 매만져주며 말을 건넸지만, 비올레는 쿤의 표정과 말투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몇 백 년이 지나도 솔직하기에는 그른 사람이었다. 솔직해도 된다고 말을 하면, 나는 항상 솔직한데? 하던 목소리에서도 늘 위화감은 느껴졌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쿤은 비올레를 뱀파이어로 만든 것에 대한, 비올레는 알 수 없는 어두운 감정의 일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비올레는 곧 앉아 있던 다리를 펴고 자세를 곧추세웠다. 응? 왜 일어나는지 모르겠다는 눈을 한 쿤의 손을 꽉 붙잡으면서 비올레는 제 곁에서 신나게 뛰어다니기 시작하는 어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어린 시절 같은 거 그립지 않다니까요, 항상 말씀드리듯이. 그냥 저 아이가 유난히 저랑 쿤 씨를 닮아서,”

비올레가 설명을 이어가려는데 비올레의 곁에서 뱅뱅 맴을 돌며 뛰던 아이가 휙 뒤를 돌아보더니 마구 달려 비올레와 쿤에게서 멀어졌다.

“아가!”

아이가 뛰어가고, 아이의 부모인 듯한 사람들이 다가오면서 인간 세상의 두 사람과 두 뱀파이어와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닮았다고? 쿤은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눈이다가, 순식간에 눈에 들어온, 아이를 끌어안는 남자와 곁에 선 또 다른 남자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잡고 있던 비올레의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잡았다. 놀람에서 나온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마구 달려온 아이를 힘 있게 끌어안아 주는 남자는 갈색의 부스스한 머리에 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아이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며 아이를 품에 안아 들어올렸다. 곁에서 아이의 손에 들린 사탕을 받아 요리조리 살펴보는 경계심 많은 눈을 한 남자는 푸른 눈동자에 은청발 단발머리를 한 사람이었다.

“아빠! 아빠! 저기 저 사람들이 사탕을 줬어요!”

“그랬어요?”

“잠깐만. 이상한 사람들 같은 데 함부로 먹지 말고 아빠 줘봐.”

아이는 갈색 머리의 남자 품에 안겨서는, 사탕을 달라는 은청발 머리의 남자의 말에 울먹한 표정을 해 보였지만, 곧 제 사탕을 남자에게 내어 주었다. 청은발 남자는 알사탕 하나를 요리 조리 둘러보고, 향을 한 번 맡아보다가, 갈색 머리의 남자가 웃으며 무어라고 속삭이자 결국 사탕의 껍질을 까서는 아이의 입으로 넣어주었다. 해맑게 웃음을 되찾은 아이는 저 멀리, 틀림없이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뱀파이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이를 안은 남자와 곁의 남자가 잠시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서로 손을 맞잡고 멀어져 갔다.

“정말 닮았네.”

“그쵸?”

비올레는 멀리 멀어져 가는 남자 둘이 꼭 붙잡은 손을 보면서 여즉 쥐고 있는 쿤의 손을 다시 힘을 주어 꼭 붙잡았다. 인간의 삶 같은 것은 이미 관심사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는 사실을 쿤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세상에 내려오면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오로지 쿤과 지냈던 나날들뿐이었다. 그렇게 추억처럼 머릿속에 맴도는 천진난만한 쿤의 모습이, 어린 아이와 겹쳐지면서 놀랍도록 저와 쿤을 반반씩 닮은 아이가 유난히 반가웠을 뿐.

“꼭 우리 아이 같아요.”

“.....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쿤 씨를 닮아서 너무 예뻤는걸요!”

“그래서 그렇게 쓰다듬어주고 사탕도 주고 그랬어?”

“그럼요.”

“너도 닮았던 걸.”

“역시 우리 아이 같죠?”

“... 자꾸 그런 말 쓰지 마!”

“부끄러워서요?”

“......”

능글맞기는... 저리 비켜! 쿤은 제 손을 붙잡은 비올레의 손을 뿌리치려다가, 되려 힘 있게 잡아버리는 손 아귀에 붙들려 뾰루퉁한 표정이었다. 화끈거리는 얼굴은 부끄럽기 그지 없는 가운데,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비올레가 얄미웠다.

“좋아해요, 인간 세상 같은 거보다 훨씬 많이.”

“인간 세상 같은 게 뭐야.”

“좋아한다구요.”

“예전부터 직진밖에 못하는 건 하나도 안 변하네.”

“영원히 안변하기 위해서 뱀파이어가 됐는걸요.”

그래, 알았- 말하려던 찰나 쪽 하고 갑작스럽게 입술이 맞닿아왔다. 야! 비올레의 어깨를 매섭게 내리치는 쿤의 손길에도 비올레는 내내 웃는 채였다.

“고마워요, 영원히 함께 해줘서.”

작게 터지는 웃음과 함께 쿤은 잡은 비올레의 손을 꾹 힘주어 잡았다. 산뜻하게 나란히 내딛는 두 쌍의 걸음은 영원의 맹세를 함께 담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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