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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밤쿤] 돋을볕 01

[밤쿤] 돋을볕 (가제) 01.

밤은 며칠 사이 더 심해진 것 같이 따끔거리는 상처 부근을 바라보다 묶어 두었던 천을 끌러내었다. 낯선 곳에서 가장 먼저 저를 반겨준 건 이 나라의 토착 벌레로 생각되는 벌레들의 습격이었다. 워낙 병치레 없이 살아온 몸이라 그저 며칠 있으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물린 자국들이 낫지 않고 있었다. 결국 밤은 낯선 곳이라 함부로 밖으로 걸음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 들어오던 날 가까스로 마련한 작디 작은 초가집의 문을 열고 나온 밤은 나라에 들어오던 날에 보았던 길을 따라 시가지에 나와 힘들지 않게 큰 의원을 찾을 수 있었다.

“저… 계신가요?”

마을과 산의 중간쯤 위치한 의원은 크지는 않지만 제법 깔끔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시끌시끌한 장터와 멀지 않은 곳에 있음에도 의원 근처는 조용했다. 간간히 새가 지저귀는 곳에는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푸른 나무들의 시원한 그림자와 푸른 녹음이 자욱했다.

“들어오세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열리는 나무문을 안쪽으로 밀며 들어서자 산 중의 향기가 훅 흘러나왔다. 들어오자마자 약재들이 쌓인 곳을 두리번거리는 밤의 낯선 모습을 보며 쿤이 말했다.

“이 곳에만 머무른 지 오래되어 몰랐는데, 약초의 냄새가 나는가 보네요. 방금 따온 약초들이 많이 쌓여있어 그렇습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밤과 눈을 마주하며 쿤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원의 옷을 걸치고 단정하게 허리끈을 매어 두른 쿤은 조심스러운 눈빛을 하고 자신을 마주해오는 밤을 보고 손님을 맞을 때 으레 짓는 웃음을 지었다. 다소 서투르게 정리된 갈색 머리, 먹빛에 가까운 색을 가진 복장이 수수함에도 불구하고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만은 화려하다 싶을 정도로 빛이 났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 그 벌레에 물린 것 같은데 쉬이 낫질 않아서...”

밤은 옷소매를 걷어 벌레 물린 곳을 드러냈다. 팔에 두 군데, 다리에 한 군데. 치료가 전혀 되지 않은 자국들을 훑어보던 쿤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의 약초 상자에 다가갔다. 기다란 청은발의 머리카락이 쿤이 움직이는 대로 어깨의 앞뒤로 흘러내렸다. 쿤이 손 높이보다 아래쪽에 위치한 약재를 꺼내느라 다리를 숙여 앉자 머리카락이 허리를 넘어 아슬하게 발목을 스쳤다. 작은 약재 상자를 든 채로 다시 쿤이 밤의 앞에 마주 앉았다.

“혹시 이방인이신가요?”

“...어...”

갑자기 던져진 물음에 밤은 잠시 망설였다. 마을에서 이방인의 존재를 금기시하고 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본래 떠도는 몸이라 이 마을 저 마을을 많이도 들렀지만 저번 마을에서도 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만큼은 말리려 했던 그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방인이라는 걸 숨겨야 하건만은, 제 앞의 남자는 이미 제가 이방인인걸 알고 물어보는 눈치였다. 생그럽게 빛나는 푸르른 눈동자를 피하기 어려워 밤이 망설이는 사이 쿤이 먼저 웃으며 입을 뗐다.

“별거 아닙니다. 이 마을에서 이 벌레는 아주 흔하거든요. 대부분의 집에서 이 벌레에 대한 치료제 정도는 모두 구비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도령께서는 이렇게 상처가 심해질 때까지 치료를 하나도 하지 못하신 걸 보니 이방인이시려니 했던 것뿐이랍니다.”

저는 도령께서 이방인이시든 아니든 치료만 해드리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말씀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안하셔도 됩니다. 부드러운 말씨로 조근조근 말을 건넨 쿤이 약초를 꺼내 상처 위로 덧대는 동안, 자신에게서 쿤의 시선이 떠난 사이 밤이 슬쩍 쿤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바다 속의 보석과 닮았을 것 같은 푸른 눈동자가 제 상처에 집중해 흔들림이 없었다. 나지막하면서도 차분함을 가진 목소리에 비해 얼굴선이나 몸 선이 얇게 떨어졌다. 얇은 비단으로 코 아래를 가리고 있던 쿤은 밤을 치료하기 전에 얼굴을 가린 천을 풀었다. 그제야 얼굴이 다 드러났다. 매끄러운 얼굴선을 지나 목선 또한 가느다랗게 드러났지만 살짝 도드라진 목울대가 눈에 들어왔다. 쿤은 비단을 옆에 두고 밤의 팔을 걷어 올려 상처를 살폈다. 상처 주위로 천을 덧대는 손가락도 희고 얇았다.

“갑자기 함께 지내던 어르신 분과 따로 지내게 되어서... 혼자서는 약재를 쓸 줄 몰라서요.”

쿤은 여전히 조심하는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밤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리저리 급하게 시선을 피하는 모양. 거짓말이구나. 쿤은 약하게 웃었다. 태양을 닮은 황금빛 눈동자. 그는 말을 삼가고 있었지만 그가 이방인이라는 건 거짓말을 못하는 그 순진한 태도에서 다 티가 났다. 눈이 마주치자 황금빛 눈동자 아래로 뺨에 붉게 노을이 지는 모습이 여지없이 서투른 소년이었다.
쿤은 손끝에 닿는 천의 감촉에 집중했다. 다른 생각에 흔들렸어도 손은 야무지게 밤의 상처를 천으로 잘 덧대어놓았다.

“그대로 두면 쉽게 덧난답니다. 약재와 천을 드릴 테니 가능하시다면 하루에 두세 번,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새 약재를 상처 위에 올리시고 천으로 덧대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미 치료가 늦어서 상처가 많이 물러버렸으니 일주일 정도는 자주 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시간은 언제가...”

쿤은 밤에게 주려는 약재들을 천안에 넣고 차곡차곡 쌓으려고 움직이다가 갑작스럽게 제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잡아오는 밤의 온기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여기, 손목에 상처가...”

아, 쿤은 아까 약재를 따러 갔다가 뾰족한 나뭇결에 손목이 스친 것을 기억해냈다. 긁혀 피가 살짝 비치는 손목은 미미하게 부어있었다. 제 상처가 훨씬 심한데도 불구하고 쿤의 손끝 정도가 살짝 베인 상처를 보고 밤은 금세 표정이 침울해졌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큰 상처도 아닌데요.”

“하지만, 예쁜 손인데...”

초면부터 망설임이 없는 말씨에 반짝이는 눈동자가 손끝으로 떨어지는 감각까지 더해지니 왠지 모르게 손끝과 더불어 얼굴까지가 화끈화끈거렸다. 조심스럽게 붙잡힌 손을 빼내자 밤이 퍼뜩 놀라 쿤과 눈을 마주했다.

“아, 죄송해요. 의원님께 실례가 되었다면...”

“아니에요. 그것보다, 저는 의원이 아니니까 그렇게 부르지 않으셔도 돼요.”

“의원이 아니시라구요?”

“약재와 상처를 다룰 줄 아는 건 맞지만 정식적으로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잠깐 이 곳 의원인 여동생이 자리를 비우면서 제게 부탁을 해서 있는 거구요.”

아, 그러시구나. 밤은 여전히 시무룩한 채로 대꾸했다. 다음에 와도 계실 줄 알았는데. 소곤거리듯이 뱉은 말이었지만 바로 앞에 앉은 쿤에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원래 귀가 밝은 편이기도 했다. 특별한 기운을 타고나서 인지 전체적인 몸의 감각과 기운이 모두 일반 사람들에 비해 예민한 편이었다. 다시 한 번 밤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손끝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편하게 쿤이라고 부르세요.”

“그래도 될까요? 아, 제 이름은 스물다섯번째 밤이에요.”

“독특한 이름이네요.”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저보다 나이가 많으실 것 같은데...”

쿤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면부터 말을 놓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밤의 행동이나 말씨가 어린 애처럼 서툴진 않아도 워낙 순하고 앳되어 보이는 탓에 밤에게 말을 놓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음, 그런데.. 쿤이 눈을 가늘게 떴다.

“... 나이 많을 거 같다는 말이 무례하다는 건 알고 있지?”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저는... 사실은 제 나이를 모르지만. 일하시는 모습이 능숙해 보이셔서. 저보다 오래 사셨을 거라...”

나이를 모른다고?
쿤은 가늘게 뜬 눈을 하고는 밤을 바라봤다. 아차, 싶었던 밤은 이내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재빠른 쿤의 눈치로는 밤이 그저 범상한 인물은 아니구나 하는 경지에 다다랐다. 알았어- 쿤은 대꾸했다.

“이방인이라는 건 비밀로 해줄게.”

밤에게는 한 없이 길었을 침묵을 깬 제법 가벼워 신이 나 보이기까지 하는 쿤의 목소리였다.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목소리였음에도 밤은 의심 없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쿤은 결국 속으로만 삼키던 웃음을 터뜨렸다. 의심 가는 부분이 많아 이방인이라고 지레 짐작한 것에 아무 생각 없이 긍정해오는 게 ‘큰일을 한다는’ 혹은 ‘무서운’ 존재로 통하는 이방인 치고는 참 순수했다. 밤은 제 앞에서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쿤을 바라보았다. 여러 마을들을 전전해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자신을 마주하고 즐겁게 대해주는 사람은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외로운 마음에 웃음이 스며들었다.

“내일 봐, 밤.”

쿤은 흰 천으로 쌓인 약재를 밤의 손에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약재를 받아든 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마저 얼떨결인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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