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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밤쿤] 신의 선택

-쿤른전력, '에로스와 프시케'

주제는 에로스와 프시케 이지만 이 설화에서 변형한 부분이 많습니다! 아주 모티프 혹은 영감 정도로만 반영했다고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밤쿤] 신의 선택

w. 쿠엔

이봐라! 천지, 아니, 천(天) 즉 하늘 세계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아게로가 한 쪽 귀를 막으며 무감각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포도를 집어먹고 있었다. 무슨 일이길래 또 화가 나서 저렇게 소리를 지른대, 다혈질 양반이! 라고 생각했지만 곧 이어 정확히 자신을 지목해 부르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결국 아게로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게로! 이리 와 보거라.”

“왜요, 또.”

“또가 아니고! 건방지긴. 네가 처리하기에 딱 좋은 일이 생겨서 불렀으니 잘 듣고 시킨 대로 하거라.”

“무슨 일인데요.”

“인간 세상일이다.”

오, 인간 세상으로 가는구나! 본디 인간 세상을 더 좋아하던 아게로는 표정만은 애써 여전히 관심 없는 척 웃음을 참고 있어도 조금은 더 흥미로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 아버지이자 이 곳을 관장하는 향락과 아름다움의 신인 에드안의 말에 보통 귀를 기울이는 일이 없는 아게로였지만 그래도 끝까지 하는 말은 들어보자, 정도의 흥미가 동했다고나 할까.

“저기 인간 세상에 아주 요망한 사내가 있어, 이 여자 저 여자 할 것 없이 그 사내를 사모하고 쫒아 다니느라고 나를 숭배하는 여자들이 아주 줄어, 아니 아예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져버렸더구나. 이에 내 분노가 하늘을 뚫고 인간 세상에 내리니, 어서 가서 그 사내를 좀 괴롭혀주고 오너라. 영원히 사랑을 할 수 없게 말이야!”

포도주가 담긴 잔을 한 손목으로 살살 돌리며 말하다가 끝내 마지막에는 분노했는지 와인잔을 들어 한 번에 입에 털어넣으면서 에드안은 아게로를 바라보았다.

“얼른 내려가라. 그리고 최대한 빨리 처리해. 알았느냐?”

아게로는 제법 구미가 당기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준비가 되는 대로 내려가죠.”

물론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처리될지는 난 잘 모르겠지만- 아게로가 흥얼거리면서 에드안이 머무는 신전을 나오는 동안에도 에드안은 아게로와 그 인간 소년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게로는 준비를 한다고 제 거처에 들어와서는 평소 다른 이들을 괴롭히거나 수를 쓰러 갈 때처럼 화살을 정비하는 대신에, 화살은 대충 겉멋으로만 들고 가기 위해 담아만 두고 제 머리를 빗어 내리는 데 집중했다. 인간 세상이라니! 게다가 요즘 인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시다는 일명 슈퍼스타를 만나러 간다니. 아게로는 평소 잘 보이지 않는 즐거운 웃음을 보이면서 준비를 마치고 거처를 나섰다.

“다녀올게!”

다른 신들을 등지고 인간 세계로 향해가는 날개짓이 마냥 즐거워보였다.

오랜만에 인간 세상에 나온 아게로는 이리 저리 장터도 구경하고, 사람들을 따라 구경하며 놀러다니느라 정신이 없다가 햇살이 내리쬐다 비가 내리가 변덕을 부리는 날씨를 보고 그제서야 에드안의 분노로 여기 내려왔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제가 찾는 집을 향해갔다.
소년이 산다는 집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도 쉬웠다. 풍문을 따라 갈 수 있겠다는 제 예상이 적중해서, 길거리에 있는 소녀며 소년이며 할 것 없이 수려한 외모에 착하고 싹싹하기 그지없는 괜찮은 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자자했다. 어디에 사는지도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면 금세 귀에 들어왔다. 아, 저 강을 넘어서 바로 오른쪽 골목에 있는 작은 집.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일에 아게로는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장난도 치고 개울가에 날개짓으로 물을 튀겨대며 놀던 아게로는 날이 저물어 가자 천천히 소년이 산다는 집으로 향했다.
소년이 산다는 집은 수수했다. 풍문으로 듣고 찾아오지 않았다면 지나치기 딱 좋을만큼 다른 집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 그 소년이 산단 말이지, 아게로는 창문으로 슬쩍 안을 바라보았다. 아직 사람들이 잠들 시간이 되지 않아 집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있는 상태였다. 집 안을 분주히 쓸고 설거지를 하고 부엌을 정리하고 있는 소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인간들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저 소년이 맞나보다, 하고 아게로는 소년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소년은 곧 집을 간단하게 둘러보고, 문을 잠근 후에 제가 창문 너머로 보던 침실에 들어섰다. 안타깝게도 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훤칠하게 키가 큰 인영과 잘 잡힌 골격을 보아하건데 자신의 기대를 만족시킬 것 같았다. 아게로는 소년이 침대에 누워 잠시 뒤척이다가 움직임이 사라진 것을 보고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건너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소년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있었다.

“와...”

아게로는 침대에 걸터앉아 소년을 바라보았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날렵한 얼굴 선이 눈에 들어왔다. 갈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채 였지만 진한 눈썹이 슬쩍 보였고, 완벽하게 음영을 가지는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게 잡힌 전형적인 미남의 모습이었다. 그래, 이런 얼굴이라면 누구라도 좋아할만 하지. 쿤은 한참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슬쩍 소년의 앞 머리를 옆으로 쓸었다. 이마와 눈썹을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였다. 그러다가 소년이 깨버렸는지 잠시 미간이 움틀, 하다가 소년이 눈을 떴다.

“안녕?”

“헉, 누구, 누구세요?”

문은 아까 잠그고, 잠그고 잔 거 같은데! 소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세상에, 아게로는 낮게 탄성을 질렀다. 하마터면 이 눈동자를 못볼 뻔했잖아. 꿀을 감아놓은 듯이 선명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소년의 화룡점정이었다. 이렇게 완벽할수가! 아게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화살통은 이미 방 끝으로 던져놓은 지 오래였다.

“이름이 뭐야?”

“네?”

“음, 내 소개 먼저 할게. 난 쿤 아게로 아그니스야. 앞으로 친하게 지낼테니까 쿤이라고 편하게 부르고.”

“앞으로..?”

“그럴 일이 있어.”

난 네 운명을 이끌어줄 신이거든. 아게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눈부시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소년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자신을 바라봤다. 조금 거짓말을 섞기는 했지만, 소년을 데려가기에 이만한 핑계는 없었다. 또 엄연히 말하면 에드안의 분노로부터 이 소년을 숨겨주고 앞으로 함께 지낼테니 영 틀린 말은 아니고.

“아, 제, 제 이름은 스물다섯번째 밤이에요!”

“그래, 밤?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잘 들어봐.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줄게. 아게로는 소년의 곁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온통 화려하게 반짝이는 사람이라, 밤은 제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신이라는 것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수수께끼였다고 하더라도 천사라고 굳게 믿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새햐얀 날개를 가지고, 반짝임을 흩뿌리며 웃을 수는 없으리라. 밤도 쿤 옆으로 바짝 몸을 기울여 붙어 앉았다. 만족스러운 밤의 반응에 아게로가 소근거렸다.

“네가 인간 세상에서 너무 인기가 많은 바람에, 신들 중에서 가장 인간 세상에서 칭송 받던 신에 대한 인기가 훅 줄어버렸어. 성질 더러운 그 신이 화를 내는 바람에, 내가 조금만 늦었으면 네게 그 분노가 그대로 내려꽃힐 뻔했지 뭐야. 하지만 걱정하지마, 내가 지금 여기 왔으니까!”

내가 너와 함께 널 지켜줄게. 괜찮지? 아게로는 밤을 바라보았다. 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아게로에 대한 의심은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자신을 구하러 온 신이라니! 자신만의 수호천사가 아닐까, 이 감사함은 어떻게 전해야 할까 같은, 아게로가 들으면 아주 흡족해할만한 걱정들만이 밤에게는 가득했다.

“물론 같이 갈게요. 정말 감사해요. 제가 어떻게 보답을 해야할지...”

“쉬워. 내 곁에서 떠나면 안 돼. 알겠지?”

그럼 곧장 그 성질 나쁜 신의 눈에 발각될 테니까 말이야. 나랑 함께라면 영원히 죄가 내려올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야. 아게로는 자신 만만하게 이야기 했다. 그러자 밤이 덥석 쿤의 손을 잡았다.

“그럼요! 정말 감사해요. 앞으로 영원히 함께 해요. 저는 정말 너무나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요.”

이렇게나 좋은 신이 제게 와주시다니... 감동으로 그렁그렁한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아게로는 씩 웃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일을 저질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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