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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밤쿤] 향수 (nostalgia)

-쿤른 전력, '익숙한 향기' , '환생'

[밤쿤] 향수 (nostalgia)

w. 쿠엔

‘성인이 된 걸 축하해요, 쿤 씨.’

밤이 선물해 준 향수의 뚜껑을 열 때면 늘 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따라왔다. 상쾌하고 가벼운 향기는 그에게 어울리기보다는 확실히 저에게 어울리는 향기였다. 열심히 발품을 팔아가며 제게 가장 어울릴법한 향기를 구해왔다는 밤의 말이 이럴 때면 정말 실감이 나는 것이었다. 향수라는 건 써 본 적도 없고, 그 어떤 향기도 두르고 다니지 않아 향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저에게 이렇게나 향이라는 것이 익숙하고 편안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흔하지 않은 향인데도 편안함을 주는 익숙한 향기였다. 성인이 된 쿤을 축하해주던 동료들과의 파티에서 향수를 받고 나서 고맙다고 인사하며 밤을 바라보던 쿤에게, 잠시 머뭇거리다가도 이내 과감하게 제 입술을 포개오던 밤의 모습이 익숙한 향기를 맡고 있으면 문득문득 스쳐 지나갔다. 쿤은 아직도 뜨거움과 사랑스러움이 밀려드는 감각을 느끼면서 향수를 다시 바라보았다.
뚜껑이 열린 채로 잠시간 시간이 흐르면 마치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애초부터 액체가 아닌 기체인 것처럼, 향이 모락모락 입구를 통해 퍼져 나왔다. 이미 쿤이 자주 뿌린 덕에 옷과 몸에 붙어 방을 가득 채우는 체취에 더불어 향이 섞여 나갔다. 쿤은 뚜껑을 열고 화장대 위에 놓아두었던 향수를 바라보다가, 나갈 시간에 서둘러 향수를 뿌리기 위해 향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움직임이 좋지 않았다. 로션을 바른 후에 서둘러 향수병을 집은 손은 미끄러웠고, 속절없이 유리병이 쿤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아차, 싶은 사이 신수로 그를 막기도 전에 향수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 순간 엄청나게 강한 향이 한 번에 바닥에서부터 쿤의 코끝으로 흘러들었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르게 매캐하다 싶을 정도로 강한 향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상황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 쿤은 멍하게 굳어 있었다. 향수가 흘러 쿤의 슬리퍼를 적셔갔다. 무슨 일이지? 급작스럽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기체인 향수가 액체가 되어 머릿속을 흠뻑 녹여버린 것처럼 방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물처럼 흘러 내려가는 향수의 표면 위로, 어떠한 모습이 비쳤다.

그 곳에는 제가 아닌 밤이 향수를 깨뜨린 채로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쿤 씨, 무슨 일...”

밤은 방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는 것에 놀라 급히 뛰어와 쿤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코를 찌르는 향수 향에 그대로 같이 굳어버렸다. 향수가 깨져, 그 향수가 흘러 그의 슬리퍼를 모조리 적시고 있는데도 그 가운데 서 있는 쿤은 고개를 숙인 채로 미동이 없었다.

“쿤 씨, 괜찮으세요? 안 다치셨어요?”

밤은 향수가 깨진 조각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히 다가가 쿤의 어깨를 짚었다. 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 밤. 느릿하게 말이 흘러나왔다.

“... 왜 울고 계세요.”

밤은 천천히 손을 들어 쿤의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왜 우는 거지? 쿤은 밤이 제 뺨을 닦아내는 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울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아니, 잠깐, 방금 전에, 네가 들어오기 전에... 중얼거리는 쿤의 모습을 바라보며 밤은 깨진 향수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산산조각 난 유리 병, 깨져버린 혼, 그리고 과거의 순간들. 쿤이 환영처럼 보았던 순간들이 밤의 머릿속에서는 그 어떤 장면보다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날카로운 향수가 심장을 고통스럽게 죄어왔다.

“알아요. 마음이 편하지 않으신가요?”

안다고? 쿤은 여전히 멍한 눈동자를 들어 올려 밤을 바라보았다. 제가 깨진 향수병에 찔려 아픈 것 마냥 어딘가 아프게 웃어 보이는 표정이 낯설었다.

“미안해요. 그런 모습을 보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향수를 깨뜨린 건 난데, 왜 네가 미안해.”

“원래 향수를 깨는 사람은 쿤 씨가 아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야. 떨리는 쿤의 손을 밤이 붙잡아왔다. 늘 단단하기만 하던 손이 제 손 못지않게 떨리고 있었다. 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쿤이 본 모습은 제가 퍼그에 들어가 버렸던 미래의 비올레의 모습일 것이다.
비올레가 된 과거의 자신이, 쿤을 잃고 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그의 유품인 향수를 깨뜨리고 눈물을 흘렸던 그 때. 그 때가 바로 운명을 뒤집은 때였다. 그를 지키기 위해서 퍼그에 들어가고 나서 결국 퍼그에 의해 그를 잃어버렸을 때, 더 이상 살아가는 의미가 없어져 버렸을 때, 밤은 초인적인 힘을 빌리고자 가시를 시동했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운명을 뒤집었다.
새롭게 운명을 부여받은 생은 당연하게도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시작했다.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쿤에게 모든 기억은 완벽하게 지워진 채 다시 밤과 첫 만남을 가졌고, 밤은 모든 걸 기억하는 상태에서 쿤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아주 먼 미래의 그 날이 될 때까지 둘의 삶은 완벽하게 같을 것이었다. 다만 마지막 순간 삶과 죽음을 바꾼 미래의 순간에 다다르면, 환생한 운명은 뒤바뀐 길을 선택하게 될 일이었다. 그 전에 쿤이 그 일을 알게 되어서는 안됐다. 알려줄 수 없었다. 전생과 똑같은 향수, 똑같이 조각난 유리병, 그리고 달라진 것은 미래의 운명뿐이었다.

“미안해요. 더 이상은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밤.”

말없이 몸을 끌어안아오는 온기가 얕게 떨렸다. 쿤은 스쳐가는 환영처럼 본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신 아까 화끈하게 밀려들던 익숙한 향기가 다시 코끝을 스쳤다. 쿤은 무언가 밤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하는, 혹은 이야기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화련에게 찾아가 볼까, 하는 순간에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마요. 지금부터는 어떤 게 떠올라도, 생각하지 마요. 제발, 제발... 지금 이대로 있어줘요.”

“...그래.”

쿤은 어린 애처럼 마구 품을 파고들어 오는 단단한 몸을 그저 끌어안았다. 네가 그래달라고 한다면, 그렇게 할게. 아까 했던 생각은 어느새 사라진 이후였다. 이 눈물을 외면하고 무언가를 찾는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진실을 알아버리면, 이렇게나 가엾은 제 사랑이 그대로 스러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그렇게 생을 다해서 사랑하기로 약속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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