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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밤쿤] 새로운 시작

-신의탑 60분 전력 '시작'

[밤쿤] 새로운 시작

w. 쿠엔

승탑 시험에 실패했다, 라는 사실은 밤에게나 쿤에게나 낯선 일이었다. 좀처럼 실패하는 일 없이 한 번에 승탑 시험에 성공하곤 했었기 때문에 더더욱 예상치 못한 실패는 한 번 쯤 머릿속에서 생각해보던 감각보다도 더 껄끄러운 것이었다. 서로 수고했다고, 괜찮다고 어깨를 다독여주는 가운데에는 밤이 있었다. 누구보다도 실력에 있어서 실패를 겪어온 적 없던 그가 위로를 먼저 건네니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추슬러졌다. 괜찮다고, 금방 다시 해낼 수 있을 거라고. 하필이면 시험에 실패한 층에서 치러야 하는 시험이 일 년에 한 번만 있다는 것은 힘든 일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네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팀의 리더의 위치에 있던 쿤의 표정은 명백하게 어두웠다. 팀원들을 생각해서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고, 다음 시험을 준비하자는 말을 남기기는 했지만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흘끔흘끔 쿤의 눈치를 보고 있던 팀원들에게 그나마 쿤의 모습을 덜 신경 쓰는 듯 하며 웃으며 위로를 건네는 건 밤의 몫이었다. 그러나 제 방문을 힘없이 열고 먼저 들어가 버리던 쿤의 뒷모습에 가장 끝까지 시선을 주는 것도 밤의 몫이었다. 쿤이 먼저 들어가 보겠다는 짤막한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간 뒤 오래 흐르던 정적을 깬 건 엔도르시였다.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지.”

엔도르시가 쭉 기지개를 켜며 이수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알아서 요리해 바치라는 말 없는 분부에 이수는 하, 한숨을 쉬면서도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기왕이면 맛있는 거 좀 먹을까? 어때, 고기라도 먹을까?”

가서 사올까? 가까스로 밝아지는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듯 애를 쓰며 팀원들이 우르르 일어섰다. 일사분란하게 장바구니를 챙기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역할을 나누어 움직이는 이들 사이로 밤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저, 이수씨...”

막 부엌으로 향하려던 이수가 밤을 바라보았다. 이수는 마치 밤이 말하려는 바를 아는 것처럼 슬쩍 쿤의 문 쪽을 눈짓해 물음을 전하자, 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원한 목소리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래, 밤. 피곤하지? 쉬어도 돼.”

밥 되면 부를 테니까. 쿤도 데리고 나올 수 있으면 좋고. 이수는 은연중에 밤과 쿤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쿤이 혼자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 곳에 자약히 들어가 쿤을 위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사람이 밤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밤은 전하려는 바를 전하고서야 쿤의 방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잠겨 있을까? 문고리를 바로 잡아 돌리려던 손이 멈칫 하고는 문을 두드렸다.

“저, 쿤 씨.”

“.... 들어와.”

안 잠겨있었구나. 밤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책상에 앉아 무언가라도 들여다보고 있을 줄 알았던 쿤은 의외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한쪽 팔을 들어 눈을 가린 채로 누워 있던 쿤은 다가오는 인기척에 팔을 떼어 내고 눈을 깜빡였다. 오래 그 자세로 있었던 듯, 빛에 적응하기 위해 쿤의 눈이 깜빡이는 동안 밤은 방문을 닫고 쿤의 침대에 그의 허리께로 다가가 걸터앉았다.

“주무시려구요?”

“아니, 그냥 잠깐 누워만 있었어.”

“피곤해보이세요.”

“너도.”

옆에 누울래? 쿤이 손바닥으로 가볍게 침대 옆을 툭툭 치며 싱긋 옅게 웃었다. 이 웃음이 보고 싶어서 굳이 문을 열고 들어왔었다.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웃음이었지만, 그래도 여러 겹 겉치레를 떼어낸 웃음이었다. 밤은 쿤의 제안을 무르는 대신 침대에 온전하게 올라가 쿤 옆에 몸을 눕혔다. 자연스럽게 옆으로 돌아누운 몸이 쿤의 허리께를 끌어안아 왔다.

“좀 쉬어가는 정도라고 생각해요, 다 괜찮을 거에요.”

“... 그런가.”

“모든 일이 항상 원하는 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탑이 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처럼요. 의외의 말에 쿤이 밤을 올려다보았다. 밤은 제 어깨 근처에 머무르는 쿤의 고개가 움직이는 걸 느끼고 시선을 내렸다. 십 센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눈빛이 맞닿았다.

“그렇게 생각해?”

“그럼요. 탑은 저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거에요.”

“그건 나중이 되어봐야 알지.”

“선택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탑의 선택이 늘 옳은 건 아니지.”

쿤은 일정한 속도로 제 뒷머리를 쓸어내리는 밤의 손을 느끼면서 다른 쪽 밤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밤이 깍지를 껴 손을 잡아왔다.

“밤.”

“네?”

“이럴 때,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해?”

“언제로요?”

“언제든... 지금이 아닌 때로.”

“... 아뇨.”

“그래?”

“물론 예전에 슬픈 시간들도 있고 좋은 시간들도 있었지만, 이미 이 세계는 새롭게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사실은, 새로운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온전히 새로운 시작이라고... 제가 탑 안에 들어온 건요.”

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탑의 문을 열면서 탑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과 마찬가지로 밤에게도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 사방이 막히지 않은, 이제는 천장만이 막힌 탑이라는 세계에서. 밤에게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쿤에게도 탑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가문의 문을 닫고 나오는 것이 새로운 시작의 문이었다.
같은 곳을 향해, 서로 전혀 알지 못하던 둘이 각자의 문을 닫고 나와 한 걸음 디딘 곳에. 그곳에는 키 보다도 큰 갈대밭이 드넓었고, 그곳에, 피 내음이 낭자하던 곳에 네가 있었다.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가 버리면 쿤 씨랑 만나지 못하잖아요.”

“라헬이 있잖아.”

“그녀는 그 세상의 전부였고, 이곳에서는.”

당신이 전부에요. 밤은 약하게 일그러진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에게도 이곳 이전의 세상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새롭게 시작한 거에요. 이번 층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냥 새로운 길을 연 것뿐이에요. 1년 더 머무르면서 어떤 게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쿤 씨가 말씀 하셨듯이 내년이 되기 전에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이었는지 알 수 없죠.”

“... 그래.”

쿤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깨 아래로 가슴께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심장의 박동이 들려왔다. 과거의 무엇이 있든 간에 눈앞에 있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었다.

“나쁘지 않네.”

“역시 그렇죠?”

“저번에 못 가본 이 층의 바다에 가볼래?”

“이번 주에 꼭 가요.”

새로운 건 언제나 끝나기 전엔 시작만으로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끝을 품고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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