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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밤쿤] The Universe

-쿤른 전력 '나의 우주'

[밤쿤] The Universe
w. 쿠엔

황홀 같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테라스에 나가 난간에 몸을 기댄 쿤이 노을빛이 퍼져 나가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열 차게 물놀이를 즐긴 동료들은 모두 잠에 빠져 있었다. 물에 들어가기는 해도 체력을 전부 다 소진할 만큼 뛰어다니지 않은 쿤이었기에 한 두시간만에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쿤은 아까의 난리 아닌 난리를 생각하며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물놀이를 하러 바다에 왔으니 몸은 적셔야 한다는 게 자왕난의 논리였다. 굳이 젖고 싶지 않은 쿤이 만류해봤자 이미 동료들은 사악한 웃음을 짓는 자왕난의 편이었다. 우르르 몰려들어 쿤의 몸을 잡아들어 얕은 바다 속으로 던져 넣는 움직임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행복해 보여서 당하는 쿤이 마냥 불쌍했던 밤조차도 그걸 말리지는 못했다. 힘으로 얼마든지 동료들을 바닷속에 처박을 수 있는 쿤이 반쯤 체념하고 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수영조차도 필요하지 않은 깊이에서 쿤이 재빠르게 발을 바닥에 딛고 일어서자 허리께로 바닷물이 동료들의 웃음소리처럼 흔들렸다. 자왕난 너 이 자식!! 팍팍 물을 헤집고 나와 자왕난에게 달려가는 쿤은 곧장 자왕난을 두 세대 쥐어박고서야 밤이 건네는 긴 타올을 받아들었다. 더 이상 쿤을 괴롭혔다가는 이 바닷속에 저를 넣고  바다를 통째로 얼려버릴 것 같은 쿤의 눈빛에 자왕난은 곧 슬금슬금 도망가서는 발리볼을 들고 와 다른 동료들과 물놀이를 시작했다. 바다 위로 부서지던 한낮의 햇살은 둥둥 떠다니는 별 같이 눈이 부셨다. 쿤은 밤이 건넨 타월로 둘둘 몸을 감고는 파라솔 밑에 누워 책을 읽거나 마찬가지로 쉬는 걸 더 선호하던 이수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때때로 동료들과 놀다가 다가온 밤은 쿤의 옆에서 타올을 바꿔주거나 쿤의 손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다가 돌아갔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이수가 눈꼴 시려워 하는 것은 덤이었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소리 없이 열린 문을 열고 테라스로 들어온 건 밤이었다. 아직 졸음이 남은 눈가를 보고 쿤이 웃었다.

“너야 말로.”

“옆 침대가 비었길래...”

“여행 오기 전까지만 해도 같은 침대 안 쓰면 절대 잠 못잔다고 하더니 잘만 자더라?”

“그래서 못자고 지금 일어났잖아요.”

난간으로 다가온 밤이 헤실 웃으면서 쿤의 허리께로 팔을 감아왔다. 뒤에서 꼭 허리를 안고 어깨에 편하게 고개를 기댄 밤이 쿤의 시선이 향해 있던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쿤이 처음 테라스에 나왔던 것은 넘실넘실 해가 바닷속에 빛을 섞으며 녹아들고 있던 때였는데, 꽤 오래 생각에 빠져있었는지 어느새 어둑어둑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곧 밤이 되겠네요.”

“그러게. 벌써 해가 졌네.”

“아직 다른 분들은 안 일어나신 것 같은데, 산책이라도 다녀올까요?”

물에 들어가는 것보단 산책 하는 거 더 좋아하시잖아요. 이미 산책 갈 마음을 먹고 하는 말이라는 걸 잘 아는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선하게 해가 져 가는 시간이라 산책도 부담이 없었다.

 
‘저 파란게... 하늘이란 거죠?’

쿤은 문득 어렸던 목소리가 생각이 났다. 제 어깨를 덮어오는 온기가 제법 듬직해서였다.

“추우시죠?”

쏴아아 불어드는 바닷바람은 확실히 쿤이 느끼기에 조금 추웠다. 겨울보다도 매섭게 날을 세우기로 유명한 그가 사실은 추위에 가장 약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시원하고 좋은데.”

“그러다가 감기 걸리세요. 저번에도 추운데 그냥 계시다가 감기 걸리셨잖아요.”

그리고 그런 그가 약해보이기 싫어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밤이 거의 유일했다. 어슴프레하게 밤으로 옮아가는 시간대. 바다는 천천히 별과 어둠을 삼키고 뱉어냈다. 밤은 말없이 제 외투를 벗어 쿤의 어깨에 둘러주고 나서 쿤의 손을 맞잡았다. 바다를 앞에 두고 고요함에 잠긴 모래밭 위에서 새하얀 손끝이 차가웠다. 제 손 안에 익숙하게 맞춰 들어오는 손은 편안했다. 그와 함께 한 세월만큼.

“탑 밖에는 진짜 바다가 있을 거냐고, 옛날의 너라면 물어봤을텐데.”

“하하, 지금도 물어볼 순 있겠죠. 하지만, 음, 아마 이것도 신수의 흐름의 일종이겠죠? 관리자가 신수로 구름과 바람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심심했나 봐요.”

“관리자도 정말 바다가 뭔지는 모를 거야. 별도, 하늘도, 우주도.”

“우주는 하늘과 달라요?”

반짝이는 눈동자가 하늘의 별을 담고 빛났다. 어릴 적의 질문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 몸과는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질문은, 그리고 그의 눈빛만큼은 어릴 적의 그의 것들과 아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처음부터 저렇게나 티 없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밤이 쿤의 눈동자를 보고 티 없는 바다를 떠올렸다면 쿤에게 밤의 눈동자는 별 그 자체였다. 쿤의 눈동자에는 바다가 들이쳤다. 수 없이 들이치고 빠져나가는 풍경들 사이로 밤의 모습만이 그대로 남았다. 음, 쿤은 다시 제 손을 쥔 밤의 손에 부러 힘을 주어 잡았다.

“우주는 하늘보다 크지. 하늘은 우주의 신기루나 조각 같은 거랄까? 사실 우리가 하늘이라고 보고 있는 건 저 멀리 우주의 일부를 잘라서 보고 있는 거니까.”

“그럼 사실 별을 키우고 있는 건 우주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쿤은 곧장 대답해왔다. 밤은 어둠 속에서 유난히 더 은하수를 빼다 박은 듯이 반짝이는, 쿤의 은빛 속눈썹이 팔락팔락 내려앉았다 다시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이 하나 있는 우주는 우주가 아닌가요?”

“글쎄, 우주라고... 할 수 있겠지? 어차피 여기 사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도 모르는데, 우리끼리 그렇다고 해도 괜찮을 거야.”

웃음기가 배어 있는 쿤에 비해서 밤은 제법 진지한 표정이었다. 여전히 넌 궁금증 많은 어린 애구나. 쿤이 저와 마찬가지로 쪼그리고 앉은 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장난스럽게 밀었다. 밤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몸을 버텼다. 밤이 살짝 고개를 앞으로 밀자 오히려 쿤의 몸이 흔들렸다. 어, 하는 사이 뒤로 주저앉으려는 쿤의 몸을 밤이 툭 받아 앉았다. 까끌한 모래의 질감 대신에 허리를 안아오는 팔이 느껴졌다.

“쿤 씨라는 우주에는 별이 몇 개나 있나요?”

“응?”

너무 가까운데. 쿤은 속으로만 말을 삼켰다. 한낮의 태양을 닮았다싶은 눈동자는 밤이면 금빛 별이 되었다.

“제 우주에는 쿤 씨라는 별만 있어요.”

정말이에요. 가만히 제 이마에 이마를 맞대어 오는 밤의 움직임이 느릿하고 부드러웠다. 본능적으로 눈을 감으려던 쿤은 가만히 이마만 맞대어오는 밤에게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숨을 느끼면서 다시 눈을 떴다. 아주 오랫동안 해주지 못한 말이 있었다. 네가 있어서 나의 우주는 항상 청춘이었다고. 수 없는 별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부서지고, 새로운 별이 생겨나고 사라져도, 그 안에 네가 그대로 있어 주어서 항상 아름다웠다. 은하수를 따라 흐르는 수십 억 개의 별보다도 아름다운 네가 있어서.

“내 안에 너라는 별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밤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장난스럽게 반짝이는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숨어 버리더니 부드러운 입술이 갑작스럽게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네가 가장 소중한 별인건 분명해.”

솨르륵 바다가 차올랐다가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쿤이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맞닿는 부드러운 입술이 있었다. 속삭임처럼 사랑스럽게 얽히는 숨결이 있었다. 그대로 하나의 우주처럼 완벽했다. 서로만으로 끝없이 팽창하는, 너와 나의 우주.

“저라는 별만 키워주세요.”

나지막한 속삭임에 어떻게 거절을 할 수 있을까. 쿤은 그래, 하고 푸스스 웃었다. 아 진심으로요. 진심이야! 다시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어온 길을 되짚어가는 둘의 뒤로 가지런한 발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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