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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쿤] 연인

[밤쿤] 연인

w. 쿠엔

11월 중순이 되어갈 무렵, 쿤은 훌쩍 비행기를 잡아 몸을 실었다. 아무 계획도, 생각도 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은 본래 자신의 여행 취향은 아니었으나, 그저 생활이 갑갑한 나머지 선택지가 딱히 없었던 탓이다. 다니던 회사에서야 쿤에게 늘 너그러운 편이었으므로, 일말의 예고도 없이 그저 한 달을 내리 연차를 내버린 쿤의 행동에도 쉽게 승인이 내려졌다. 업무에 철저하고, 철저하다 못해 자신의 업무 이외의 것까지 도맡아 척척 처리해내곤 하던 쿤에게 연차란 이전까지만 해도 없으니 못한 존재였으므로, 그런 쿤이 한 달을 쉰다고 하더라도 트집을 걸 사람이 없었다. 트집을 건다 해도 쿤을 감당해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순항을 할 것이라 예상되던 비행기는 꽤나 크게 흔들리곤 했다. 그 때마다 잠에서 깨어 눈을 깜빡여 남은 비행시간을 확인하던 쿤은, 일 년 전에 함께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나던 애인 생각을 잠시 했다. 비행기가 흔들리면 잠결에도 제 손을 붙잡아 쥐고 깍지를 껴 품에 안은 후에야 다시 고른 숨을 내 쉬던, 졸음에 겨워서도 제게 기대기보다 먼저 제 어깨에 기대라고 어깨를 내주던 갈색 머리의 애인의 모습을. 깜빡이던 눈이 감기면서 눈발처럼 산발적으로 쌓이지 못하고 흩날리기만 하던 낱개의 생각들은 지워졌다.
어느새 착륙을 앞둔 비행기는 파리의 날씨를 일러주었다. 눈이 내리며, 바람이 부는 다소 추운 날씨이니 옷차림을 챙기라는 안내를 들으며 쿤은 바깥을 다시 내다보았다. 쾅, 비행기 바퀴가 낯선 땅에 거칠게 내닿고,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멈추기 전까지 달려 나가는 그 순간에 비행기 창문을 통해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파리에는 펑펑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낮이었음에도 회색조가 완연한 날씨를, 쿤은 좋아했다. 바깥에 내려 차갑게 스미는 겨울의 공기를 맞으며 쿤은 말없이, 한없이 걸었다. 외로움은 추위처럼 알게 모르게 뼛속을 시리게 만들며 속을 파고 들어왔다. 천하의 쿤 아게로 아그니스가, 외로움이라니. 겨우 한 번 겪어본 사랑에서 얻은 것이 외로움뿐이라니. 낯선 감각을 외면하기 위해 무작정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사들고 나온 커피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라떼였다. 테이크아웃 컵의 뚜껑을 열자 드러나는 짙은 베이지, 옅은 밤색을 띠는 라떼의 표면 위로 사륵사륵 녹아드는 설탕 같은 눈발.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는 표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쿤은 라떼를 조금 조금씩 입에 머금었다. 표면 위로 잊은 줄로만 알았던 그리움이 자꾸만 밀물졌다.
바쁜 일상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보기 어려워지면서 이별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마땅히 서운한 일이라기보다는, 서로에게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 이유였다. 이별을 고한 쪽도, 받아들이는 쪽도 아쉬움보다는 서로에 대한 배려가 더 컸던 탓이었다. 쿤 씨가 만족하시지 못하셨다면... 그렇게 해요. 그의 말은 그렇게 끝이었다. 돌아서 나오면서도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다만 내일도 다시 만날 것 같은, 내일도 다시 사랑을 속삭일 것 같은, 그런 생각들이 들 뿐이었다. 쿤은 그 후 일 년을 가장 바쁘게 보냈다. 안 그래도 바빴던 시간 속에 꾸역꾸역 일들을 집어넣었다. 생각이 날 수 없도록. 축하받지 못한 작년의 생일은 생일인지도 모르게 업무 속에 파묻혀 지나가 버렸다. 올해는. 쿤은 그렇게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혼자인 건 아무래도 좋지만, 비워진 시간을 홀로라도 여유 있게, 스스로에게 기쁨을 선물해주듯이 보내고 싶어서였다.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쿤은 파리에 계속 머무르기로 했다. 눈이 흩날리며 벽돌들에 사북히 쌓이고, 고요한 밤의 거리에는 눈만이 사북사북 내리는. 화려한 형형색색의 조명 뒤에는 늘 남겨진 쓸쓸함과 고독함이 있는 파리의 밤거리를 쿤은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올해는 첫 눈부터 펑펑 내리더니 쿤이 파리에 머무는 겨울 내내 눈이 함께 했다. 추위를 타는 쿤에게 눈이 내리는 날은 오히려 다른 날보다 추위가 덜 해 바깥에 나가기 좋은 날이었다. 쿤은 매일 같이 도시를 거닐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없는 사이에서. 그는 많은 것들을 보고 눈에 담았다. 사진을 찍는 취미는 없었지만, 어색하게 한 컷씩을 담는 손끝은 이전에 카메라를 처음 쥐어볼 적과 같이 떨리곤 했다. 찰칵, 울리는 아날로그한 셔터음은 제 애인이 가장 좋아하던 것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한 컷 한 컷을 누르는 손은 과거의 온기를 담아 흔들리곤 했다. 사람이 들어있지 않은 프레임은 부쩍 외로워보이곤 했다.
제 생일이 된 그날도 쿤은 가벼운 가방과 카메라만 하나 들고 호텔 밖으로 나섰다. 버릇처럼 걸어놓은 ‘Don’t disturb’를 떼어내고 바깥으로 나서자,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차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눈은 미끄러움의 주범이어서 제법 싸늘한 눈초리를 받을 테고, 세상이 희게 덮이는 낭만을 좋아하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사랑의 눈길을 받을 터였다. 평소였다면 당연하게도 전자에 속할 쿤이었지만, 쿤은 로비에 잠시 멈춰 서 숨을 골랐다. 천천히 시간을 거슬러 후자의 감정이 쿤의 마음속으로 찾아들었다. 포근함과 사북이는 고요한 소음, 사람들의 구둣발 소리를 모두 삼키는 침착함. 쿤은 벨벳 카펫처럼 펼쳐진 흰 길의 위로 걸음을 내딛었다. 도심의 건물들이 온통 하얗게 내리는 눈들 사이로 경계를 감춘 채 고요히 숨을 쉬고 있었다.
쿤은 제 생일을 스스로 챙겨본 적이 없어, 잠시 고민을 하다가 제가 좋아하는 장소들을 차례로 들렀다. 따끈한 에그 베네딕트가 맛있었던 카페에서 아침을 간단히 먹고, 소박하지만 운치 있는 건물이 많은 골목 골목길을 손끝이 시려올 때 까지 걸었다. 배가 고플 즈음에 나타난 , 은은한 금빛 조명이 따뜻한 느낌을 주는 가게에서 기름과 후추, 소금으로 정성스러운 간이 된 생선 요리로 점심을 먹었다.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매 끼니를 채운 것은 고사하고, 세 끼를 제 떄에 제대로 챙겨 본 적조차 지난 일 년 동안 손 안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던 쿤은 서비스로 나온 와인 잔을 든 채로 나른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조용한 가게 안에는 몇 손님만이 식기를 움직이는 소리, 일행과 대화를 나누는 소리로 옅은 소음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연인들의 모습에 시선을 주던 쿤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 다시 찬바람이 스미는 바깥으로 향했다.
가지고 나온 카메라로 쿤은 제가 거닌 길을 모두 담았다. 한 거리를 걸을 적마다, 거리의 끝에 도달하면 뒤를 돌아 거리의 모습을 한 컷에 담았다. 사람은 나오지 않고, 텅 빈 거리과 건물이 프레임에 들어간 모습을 보며 쿤은 무의식적으로 거리의 한 가운데를 어루만지다가 관두었다. 빈 것이 익숙하지 않아 무언가의 빈자리를 의식하는 습관은 여즉 고쳐지지를 않은 채였다.
겨울의 해는 빠르게 져갔다. 안 그래도 구름이 많은 날씨로 인해 따끈한 해가 보인 것은 오후의 잠깐일 뿐, 곧 해가 지는가 싶더니 곧 어둠이 조금 씩 거리 사이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직 배가 고프지 않은데. 쿤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끝까지 걸어 다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사진기를 가방에 넣은 쿤은 길의 끝에 자리한 에펠탑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반짝이는 빛이 가득한 탑의 주변들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낮에는 그저 평범했던 건물이, 밤이 되어 하늘의 빛이 꺼지면, 하늘로 높이 솟아 대신 빛을 흩뿌리는 웅장한 화려함. 빛에 이끌리듯 다가선 사람들은 낮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던 건물을 올려다보며 빛에 매료되어 한껏 들떠있었다.
쿤은 높이 하늘 위로 뻗은 에펠탑의 꼭대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꼭대기부터 차근차근, 새하얀 눈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하얗게 얼어붙어 떨어지는 눈, 정각을 맞아 수려하게 반작거리는 눈과 같이 빛나는 탑의 반짝거림을 두고 사진을 찍으려 뒤로 한 걸음 물러나려던 쿤은, 마찬가지로 탑의 모습을 구경하러 온 사람이 분명한 남자에게 툭 어깨를 부딪히고 말았다. 쿤은 부딪힌 자리에서 피해서 죄송합니다, 라고 이야기하며 뒤를 돈 순간, 그대로 시선을 멈춰버리고 말았다. 저와 똑같은 카메라를 손에 든, 갈색 머리의 남자가 저와 같이 걸음을 물려 거리를 벌리던 중에 마주친 눈동자 역시, 자신만큼 놀라 있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거리를 거닐면서, 아무도 없는 거리를 담은 사진기의 프레임을 매만지면서, 문득문득 생각나던 인영이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난 탓에 쿤은 얼어붙어 있었다. 그것은 밤도 마찬가지였다. 연도 없는 타지에서, 문득 마주한 익숙한 연인의 모습에 굳어있던 상태에서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쿤이었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밤은 삽시간에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 쿤을 마주했을 때의 설렘처럼, 푸른 호수같은 그 눈동자가 눈이 내리는 풍경을 뒤로 하고 저를 담는 순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사실은 보고싶었다고, 우연히 프랑스에 업무 발령을 받았을 때 파리에 가보고 싶다던 당신 말이 떠올랐다고, 그 중 당신의 생일이 겹치는 날 파리에 들렀다고. 무엇을 먼저 말해야할지, 아니 이런 제 마음을 모두 쏟아내도 되는지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 쿤은 빤히 밤을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어렸던 첫만남처럼, 정신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제게 고정시키지도 못하던, 설렘이 고스란히 넘실거렸다.

"아, 저는 그냥... 그, "

"여기서 만날줄은 몰랐어."

"저도요. 그것도, 쿤 씨 생일에..."

"기억하고 있었네?"

"그럼요. 그걸,"

어떻게 잊어요. 밤은 말을 내뱉고 나서야 아차, 한 눈치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밤을 오래 봐 온 쿤이 모를리가 없었다. 베이지색 폴라 티 위로 붉게 물드는 귓바퀴를.

"새삼스럽네. 나도 잊고 살았는걸."

"작년에, 축하해 드리고... 싶었는데, 아니 그러니까,"

헤어진 후에 가졌던 미련 같은 감정과는 딱 보기에도 멀어보이는 쿤이 이런 감정에 질색하지는 않을까 싶어 밤이 말을 돌리려는 차에, 쿤의 웃음이 먼저 터졌다.

"왜, 올해는 안되구?"

 밤을 바라보는 쿤의 시선에 장난기가 묻어났다. 생글거리는 그 웃음과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리웠었다. 밤은 예상치 못한 쿤의 말에 밤은 다시 손사래를 쳤다.

"그럴리가요! 올해 쿤 씨 생일에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그러니까 저는, 그냥 축하보다는, 작년 우리처럼... 특별한 사이로 축하를 해 드리고 싶어서요. 갑자기 만나서 죄송한 말이지만, 쿤 씨가 괜찮으시다면."

쿤은 이미 다시 만나고 싶다, 는 밤의 의중을, 처음 눈이 마주칠 시점부터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가만히 밤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솔직하고 거침 없으면서도, 제 앞에서는 가끔 이렇게나 서툴어지는 면이 좋았다.

"선물, 줄래? 지금."

쿤은 여전히 새빨개진 얼굴로 말을 고르는 밤의 어깨를 잡아 당겼다. 코 앞에서 마주한 그 얼굴이,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명한 사랑과 설렘의 모습이었다. 밤은 다가온 쿤의 눈동자가, 환하게 웃더니 이내 눈커풀 밑으로 숨어드는 그 모습에 드디어 확신을 얻고 그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새하얀 눈이 여전히 흩날리는, 아름다운 연인의 밤이었다.

[밤쿤]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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